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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gonboy Oct 12. 2018

Prologue:

나는 중1부터 대학교까지 약 10년간 미국에서 생활을 했다. 소위 말해 미국물을 많이 먹은 놈이다. 우연찮게 중1 때 나의 영어 과외 선생님의 남편이 미국 시애틀로 교환교수를 가게 되었는데, 나와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와서 내가 덥석 문 케이스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1달간의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어학캠프의 기억이 너무 좋았기에.. 참고로 밴쿠버와 시애틀은 둘 다 각 나라의 서부에 위치하여 환경이 매우 비슷하다. 시애틀은 추후 re-location 등의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살아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도시이다.


시애틀에서 6년간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펜실베니아로 대학교를 진학한다. 그곳에서 3학기를 마친 후 카투사로 용산 미군기지에서 통역병으로 군 복무를, 그리고  2013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미국에서 왜 취업을 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고, 이번 이직 인터뷰들에서도 거의 매번 받는 질문이었다. 그 이유는 가족이 그리워서였다.


미국으로 처음 떠날 당시, 미국에는 내 친인척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랬기에 외출 및 외박이 매우 자유로웠던 카투사 시절, 거의 매주말마다 집으로 가족을 보러 전주로 내려갔다. (그 당시 여자 친구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미안..) 엄마가 해주는 밥, 그리고 엄마 아빠와 같이 도란도란하는 얘기가 나는 좋았다. 22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리고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라 불리는 그들의 삶에 대해 더 알게 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대학교 4학년 당시 학교에 있던 career center를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졸업반이 듣는 취업 세미나도 출석에 의의를 두었다. 출석을 해야 A가 나왔기 때문에.


2013년 대학을 졸업하고 유난히도 무더웠던 그해 여름, 슈트를 입고 면접들을 보러 다녔고 어느 외국계 광고회사에 취직을 하는데 호주 교포였던 우리 팀 부장의 사이코 같은 성질 때문에 1년 만에 그만둔다. 그 사람은 나와 단둘이 회의할 때는 fuck과 shit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오죽하면 만 1년 근무를 해야 받는 퇴직금도 보름 차이로 포기했을까.. 그래도 이 시간에 가장 잘한 것은 지금의 와이프를 만난, 그게 가장 잘한 일이자 유일하게 좋았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꼭 대기업을 가겠다는 포부를 갖고 취업 준비를 하였으나 말로만 듣던 취업난이 이리도 심할 줄을 몰랐다. 그래도 내 자랑 좀 하자면 NGO, 정부기관, 외국계 회사를 포함한 인턴 3번에 해외대 출신 그리고 나쁘지 않았던 학점. 그리고 대학교를 갈 때도, 인턴을 할 때도 항상 최연소, 막내 타이틀을 달고 다니던 나였다. 이러한 스펙으로 웬만한 대기업은 붙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과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몇 개월 걸릴 거라 생각했었던 나의 재취업 기간은 2~3개월을 지나 꼬박 10개월이 걸려 2015년 하반기 공채로 지금 회사에 마케터로 입사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 만 3년 4개월 만에 퇴사와 이직을 앞두고 있다. 내가 있는 업계의 불안감, 국내 대기업의 top-down 형식의 업무, 차장에서 사원까지의 동일한 업무 R&R (즉, 내가 팀장이 되는 부장이 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글로벌적이지 못한 업무환경으로 인한 나의 영어 스킬 퇴보 등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나의 이직과 퇴사, 와이프의 석사 마지막 학기.. 내 인생의 중요한 시기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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