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삶을 위한 수단이지만 때로는 존재의 이유가 된다.
인간 존재의 존엄과 생명의 위대함.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결국 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밥줄을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벌이, 즉 일이고요.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하지요.
야식은 다이어트에 적이지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말은 어쩐지 생존의 유머처럼 느껴집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영어의 diet에서 T를 빼면 die가 됩니다. 미적 아름다움의 도전은 자칫 목숨을 위협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는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작심삼일의 밤을 채우며 다시 밥을 선택합니다. 그 순간 떠오릅니다.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에서 자아실현이 가장 상위라고 했지만, 실은 밥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높은 욕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짓을 하고 있나..”
미적 아름다움도, 창조도, 영감도, 허기 앞에서는 잠시 미뤄집니다. 그러다가 주말이면 다시 아름다움을 착장하고 맛집을 찾아 나서죠. 스트레스는 먹는 걸로 풀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또 다짐하고 선언합니다.
“그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식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주는 든든함. 커피 한 잔에 기대는 내일이, 그렇게 또 시작됩니다. 메슬로우는 먹고사는 일이 안정되면 더 높은 욕구를 추구할 거라 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밥의 조건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던 것 같아요. 저는 20년 넘게 요리사였습니다. 그 시간 동안 먹는 사람을 관찰해 온 시간도 20년이 넘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매일 눈앞에서 본 임상의였던 셈이지요. (에헴!)
이런 면에서 직장이라는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첫 기회이고 누군가에겐 도망치고 싶은 구속일 겁니다. 사표를 품고 다니거나 봄마다 제비처럼 돌아오는 이들도 있고요. 하지만 마흔 즈음 직장은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 지지고 볶는 시간들 속에서 진짜 ‘나’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직장인이 아니라 직업인이 되고 싶어 집니다. 내 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기. 말하자면 인생의 말년 병장, 혹은 직업 전문가쯤 되는 나이 말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직업이 직업다워지려면 일정 시간은 직장의 삶을 통과해야 한다고요. 경쟁도 해보고 협업도 해보고 억울하고 분한 일도 겪어야 한다고요. 그 안에서 성취와 기쁨, 소소한 즐거움이 싹트니까요.
그 시기를 지나오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아, 이게 내가 평생 해야 할 일이구나.’ 아니면 ‘때려치거나요.’ 그 후 일이 글쓰기일지도 모르죠.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과 저처럼요. 한 번 해봤기에 다시 시작하는 게 두렵지 않게 되죠. 지금 우리에게는 시간과 체력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래도 매일 폰을 들고 태블릿 앞에 앉습니다. 처음엔 술술 써지다가도 금세 멈추고 다른 사람 글을 보고 풀이 죽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 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비교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결국 끝까지 남아서 쓰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요.
괴테는 『파우스트』 1부를 20대 중반에 쓰기 시작해, 59세에 완성했습니다. 2부는 82세, 사망 직전까지도 썼고요. 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57세에 출간됐습니다. 그러니 조급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어차피 대작을 쓰려고 시작한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주방에서 일하며 책을 읽었고 책을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습니다. 쓰다 보니 몰랐던 게 너무 많아, 또 읽게 되었습니다. 공자의 말처럼, “배우고 나니,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알게 되더군요.”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블로그에, 페이스북에, 여기저기 남겨왔습니다. 아마도 이름은 못 남기고 글만 남기고 떠날 수도 있겠죠.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내가 쓰면, 그게 곧 나만 쓸 수 있는 글이 된다는 것을요. 나의 리듬, 나의 호흡이 담긴 글은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글이니까요. 그 고유함, 그 유니크함이 글쓰기의 핵심이었습니다. 직업이 곧 나였듯이, 글도 곧 나였던 겁니다.
그럼 이제 내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하면 되는 겁니다. 독자나 시장의 반응은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내 언어에 내가 능수능란해지면 그때는 어디서든 내 글을 기다릴 테니까요. 영화감독 봉준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영화 공부를 하던 시절, 가슴 깊이 새긴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말입니다.”
그 말에 저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가장 개인적인 글쓰기가, 결국 가장 창의적인 글쓰기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직업을, 삶을, 나를 씁니다.
저는 또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글쓰기가 행복히길 바랍니다.
그럼.
(아, 참고로 저는 구독하는 모든 글을 다 읽습니다.. 하트는 안 누르더라도, 샅샅이 보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저에게 더 많은 영감과 인사이트, 아낌없이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