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직업의 탄생- 에피소드 최종화.

나는 나의 직업이다.

by 랑시에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직업이란 단어를 통해 ‘나’를 설명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우리는 책과 일터에서 조용히 나를 마주친다. 자기계발은 단순한 자기 연마가 아니라, 시대와 구조 안에서의 자기 구출이었다. 결국 직업은 우리에게 ‘너는 누구인가?’를 묻는 다른 말이다.



흔히들 말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그런데 정작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아주 많다.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자기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놀라웠어요.”


그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자기 취향과 재능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요?”라는 질문은 그에게 생소하고 당혹스러웠다. 돌이켜보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안다는 건 이미 축복받은 환경에 있는 셈이다.


타일러가 자란 미국이나 유럽은 비교적 그런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엘리트 계층에서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그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도 세계적인 인재를 끊임없이 배출해 왔다. 오디션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우리는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냐’며 혀를 내두른다. 공연 문화나 ‘떼창’ 문화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외국 아티스트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기대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K-pop은 이제 세계의 무대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모른다.


왜일까?


이 질문은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가 품고 있던 것이다. 90년대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같은 도발적인 책도 나왔다. 유교적 사고방식이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눌렀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던 시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적극적 사고방식』 같은 번역 자기계발서가 들어왔고, 한국에서도 고(故) 구본형 소장이 『익숙한 것과의 결별』,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등 주옥같은 저서를 내며 자기계발 붐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68년에서 78년대생, 소위 X세대가 자기계발이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첫 세대였다. 87년 민주화 이후의 자유와 혼돈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세대. 문화 예술계에서 자신의 길을 간 사람들은 여전히 ‘특이한 사람’ 정도로만 여겨졌고,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아니면 고교 졸업 후 취업을 하던지.


김애란 작가와 같은 학번인 우리 세대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정책이 등장하면서 사회 분위기는 잠시 바뀌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것은 영어 열풍과 능력 중심주의였다. IMF 이후 정보화 사회와 맞물려 자기계발은 곧 생존의 도구가 되었다.


인터넷은 온 동네의 입을 하나로 모았다.
‘엄마 친구 아들’ 이야기는 이제 우리 엄마뿐 아니라 옆집, 윗집, 아랫집 모두가 아는 이야기가 됐다. 지식은 곧 힘이 되었고, 자기 계발은 곧 성공, 성공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는 그렇게나 잘 팔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아빠’는 70년대생의 X세대와 베이비부머 세대의 상징이었다.

반면 ‘부자 아빠’는 학교가 가르쳐주지 않는 돈 버는 법을 알았고, 기숙사나 창고에서 창업해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지금은 ‘부자 아빠의 시대’다.
대학 졸업장보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력과 감각이 중요한 시대.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가 얻게 된 또 하나의 시대정신은 ‘우울증’이었다. 이전 세대에는 그냥 ‘울적하다’고 표현했다. 친구들이 끌고 나가거나 방에 틀어박혀 울다 그쳤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 책임도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겨졌다. 자기 계발은 곧 자기 책임의 다른 이름이 되었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에게 사회는 ‘노력하지 않았다’는 낙인을 찍었다. 우리는 그 무게를 우울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힐링이 화두가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옥상달빛] ‘수고했어 오늘도’가 위로가 되었으며 혼밥, 혼술, 심야식당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정말 괴로웠다. 그래서 90년대생은 공무원이 인기 직종이 되었다.


자기를 안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였다. 또 무엇을 좋아하든 간에 안정이 먼저인 사회적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 나는 책을 붙들었다. 그 덕에 남들이 말하는 돈이 되지 않는 사회·정치·문화 구조는 책을 통해 배웠다. 또 구조를 넘어선 개인이 반드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성공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조언을 남겼다.


“책을 읽어라.”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확신에 차서는, 정말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독서 클럽에 가입도 하게 됐다. 책읽기에 대해 기고도 하게 했었다. 인문, 철학, 역사, 문화, 과학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탐독했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며 내가 진정 원하는 자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 마르쿠제의 『일차원 인간』은 시스템 안에서 나만의 길을 고민하게 했다. 구본형의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직업이란 곧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 임을 내게 가르쳐줬다.


왜 요리사가 책을 그렇게 읽느냐고 묻고는 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찾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해왔다. 모든 영감은 책 안에 있었다. 창의적인 일을 할수록 책을 더 많이 봐야 한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을 좀 마셔야 한다.



성직자는 하느님이 그 직을 주었다고 믿는다.
그걸 부르심, 즉 Calling이라 한다. 신학자 장 칼뱅은 이를 보고 모든 사람의 직업은 부르심이라 말했다. 모든 직업이 다 성직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만, 신분사회의 유전자를 지닌 우리 사회에서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호구지책, 즉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계 방편으로서 직장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그 직장에서 자기 성격과 재능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 칼같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 눈치가 빠른 사람. 각자 다른 능력과 기질이 공동의 프로젝트 속에서 실현된다.


대기업 출신들이 퇴사 후 창업하는 것도 회사에서 자기 능력을 확인한 결과다. 직업의 선택은 책에 없다.

현장에만 있다. 모든 책이 말하는 공통점은 이거였다. 글도 써야 문장이 되듯, 일도 해봐야 일이 된다. 나는 어릴 적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유명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주방에서 칼질을 하고 있다. 하느님도 몰랐던 일이다. 그건 현장에서 있었다.


짬짬이 책을 읽으며 출퇴근을 성실하게 하다가 그렇게 나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책 없이 자기 직업의 확장성은 없다는 것을. 세상에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거나 이미 죽고 없었다. 얼마나 고마운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렇게 유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


부처님도 태어나자마자 말했다.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찾는 여정은 단순한 진로 탐색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자 내 삶의 형식과 내용을 만들어가는 자기 발견의 과정이다. 직업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찾는 일이었다. 책은 그 여정을 함께한 등불이었고 주방은 내가 살아낸 무대였다. 또 글은 내가 다시 나를 부르는 노래였다.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곧 내 일이고,
내가 곧 내 직업이라는 것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