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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탄생- 에피소드 15

나는 장인이 되기로 했다.

by 랑시에르


일즙일채, 국물과 채소가 하나 된 한 그릇의 음식.

나는 이 정의를 라멘이라 부른다.


산당 故)임지호 선생님을 직접 뵌 적 있었다.

늦은 퇴근 후 무심코 켜둔 텔레비전 속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한 남자가 풀을 뜯어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고 있었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KBS <인간극장>에서 양평 산골짜기 한식당 '산당'을 운영하던 임지호 선생님을 취재한 것이었다. 장독을 깨 그 위에 음식을 올리고 기왓장에 장식을 하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음식은 자연 그 자체였고 장인은 신에 가까웠다.


그때 나는 파스타 집에서 미친 듯이 일하던 젊은 직업 요리사였다. "저분 밑에서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양평으로 달려갔다. 저녁 예약을 잡아 겨우겨우 임지호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때마침 책이 출간되며 이미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하던 시점이었다. 감히 그분의 음식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다.


그날, 내 손을 들여다보시던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 일 잘하겠구나."

그리고는 주방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너도 알겠지만, 주방은 매일 반복되는 일 속에서 새로움을 창조해야 하는 곳이다. 그 반복을 견딜 수 있어야 해. 그럴 수 있다면 내 주방에 들어오너라. 언제든지 받아주마." 그날 이후 나는 어떤 요리사가 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장인이 되기로. 그것이 바로 라멘이었다.


서른둘 여름.

가게를 열며 진짜 라멘 만들기가 시작됐다.

버린 뼈와 삼겹살, 간장과 육수의 양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가스비가 밀리고 전기는 끊긴다는 통보를 받았어도 나는 라멘을 연구했다. 첫 번째 목표는 타레를 완성하는 것. 내 가게에서 마음껏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거의 십 년 만에 타레의 최종 버전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이들에게 지금도 감사하다.


"사장님, 점점 더 맛있어져요!"

"오늘 스프가 지난번보다 훨씬 좋아요."

"갈수록 깊어져요!"


아주 미세하게만 변화를 주어도 궁극의 맛을 향한 나의 집착은 손님들의 감각에 닿았다. 가게의 수익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일본인 친구들이 감탄하며 남긴 말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어릴 때 규슈에서 자랐거든. 대학은 교토로 다녔고. 그런데 네 라멘이 우리 동네 라멘보다 훨씬 맛있어!" 한국에서 번역 일을 하는 일본 친구, 츠카모토 타쿠미의 말이었다. "일본에도 라멘집은 많지만, 제대로 맛있는 집은 20퍼센트밖에 안 돼. 너 진짜 라멘 잘 만드는 것 같아.", "타쿠미! 한국에도 오래된 라멘집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난 그게 나였으면 좋겠어. 칠십 먹고도 면채 휘두르며 라멘 만드는 내 모습,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아?"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행복하겠네. 칠십 먹고도 네 라멘을 먹을 수 있으니까."


일본 라멘은 원래 중국 화교들이 만든 중화소바에서 출발했다. 일본 문화에 맞춰 변화하며 독자적인 음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 라멘은 대개 어설프게 흉내만 낸 돈코츠라멘이 전부였다. 꼬릿한 냄새에 식초의 암내 같은 꾸릿함까지. 홍대의 '착한 식당'이라 불리던 라멘집조차 구역질을 유발할 정도였다.

그걸 일본 라멘이라 말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일본에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가 있었다. 잇푸도의 창립자, 시게미 카와하라. 1980년대 중반 규슈 지역의 남성 중심 라멘 문화를 탈바꿈시켜 여성과 아이들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라멘 가게를 만든 인물이다. 이에 힘입어 9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게 된 지역 라멘이 바로 돈코츠라멘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본 라멘은 한때 마니아들만의 전유물이었고, "꼬릿한 냄새가 나야 일본 라멘"이라는 괴상한 통념이 퍼지며 1세대, 2세대 가게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대형 프랜차이즈는 인스턴트 라멘을 팔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스스로를 2.5세대라 부른다.


지금 홍대의 잘 나가던 라멘집 사장은 종종 자문을 구했었다. "사장님, 챠슈는 어떻게 만들어요?", "타마고 간장 색은 어떻게 내시나요?" 물론 가게를 염탐하러 온 이들도 많았다. 나 역시 배우고 있었고, 성장 중이었기에 누군가를 가르칠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나눌 것이 있다면 가감 없이 공유했다. 어차피 내 레시피는 계속 발전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문제는 재료였다. 국내에서 질 좋은 가쓰오부시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한 대체재료는 결국 포기했다. 한국적인 맛을 끼얹는 것도 거부했다. 나는 돈코츠라멘의 본질적 맛을 찾고 싶었다. 그 핵심이 타레였다. 타레는 육수에서 시작된다. '이찌방 다시'라 불리는 첫 번째 육수는 다시마로 낸다. 여기에 가쓰오부시를 더하면 '니-방 다시'가 된다. 여기에 소금, 간장, 정종을 넣고 사골 육수 비율에 맞춰 졸이면 기본형 타레가 완성된다. 누구나 아는 레시피이다. 이 기본 구조에서 세부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기본이 가장 기본다워지는 것은 그야말로 요리의 정수였다. 같은 재료도 온도와 시간에 따라 차이를 드러냈다.


다시마는 65도를 넘기면 비린 맛과 점액질이 나온다. 그래서 보통은 찬물에 넣어 끓기 시작하면 꺼낸다. 하지만 일본 시오라멘 장인은 엄청난 양의 다시마를 무리 없이 쓰는 걸 봤다.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낮은 온도에서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찰나, 미코의 신동민 셰프가 지나가는 말로 '55~65도 사이에서 60분간 우린다.' 말한 걸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린 향도 점액질도 나오지 않았다. 색은 엷은 황금색을 띠었다. 다시마 특유의 풋풋하면서도 감칠한 바다내음이 엷게 퍼졌다.


가쓰오부시는 85도를 넘거나 끓어버리면 쓴맛이 났다. 그래서 보통은 끓은 물에 넣고 불을 꺼버린다. 십 분이 지나면 뺀다. 그러나 다르게 하고 싶었다. 가다랑어를 훈연해 말린 뒤 대패로 민 것이기에 훈연한 불맛이 중요했다. 나는 김을 숯에 굽는 긴자의 초밥 장인 지로 선생을 떠올렸다. 또한 가다랑어를 불에 살짝 아부리(炙り)할 때 짚을 사용하는 장면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짚을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타공 트레이에 가쓰오부시를 깔고 사과나무와 참나무 훈연칩을 태워 연기를 입혔다. 그랬더니 극강의 감칠맛이 살아났다. 시간도 80도에서 50분 그리고 가쓰오부시 양을 네 배로 늘렸다.


소금은 천일염을 건조해 썼다. 볶으면 단맛이 나지만, 강불에 볶아 바다의 풍미를 잃고 싶지 않았다. 트레이에 널어 건조하는 방식이었고 꽃소금으로는 느낄 수 없는 달큼함이 남았다. 게랑드 소금, 히말라야 소금도 써봤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결국 국산 천일염에서 충분히 깨끗한 맛을 찾을 수 있었다. 천일염은 염도가 낮아서 계량에 문제가 있었다. 꽃소금은 역시 수분이 높았다. 단순한 건조가 아니라 수분 자체가 소금에 스며들기 바랬다.


은 백화수복(한국의 정종)과 일본 사케 중 정미율 50%인 *다이긴죠(大吟醸)-최상급 사케를 썼다. 미림 대신 쌀 본연의 향과 단맛을 살리고자 했다. 일본 요리에서는 이를 '아마미'라고 하는데 발효된 단맛에서는 느긋한 향긋함이 난다. 일본의 다이긴죠에서는 내가 필요한 단맛을 내고 있었다. 국내산 정종의 부족한 부분을 다이긴죠의 깊이로 채웠다. 정종과 다이긴죠는 1:1 비율로 3600ml 사용했다.


간장은 야마사의 우스구치 쇼유였다. 1645년 시작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간장 회사의 제품이었다. 1895년부터는 황실 납품에 하는 명실상공 최고의 간장이었다. 밝은 색과 향긋한 단맛, 무겁지 않은 풍미, 색이 진하지 않아 육수(스프) 색을 해치지 않았다. 필터커피처럼 투명하면서도 매끈하고 세련된 느낌의 간장, 야마사의 우스구치 만한 게 없었다.


도 바꿨다. 처음에는 삼다수를 비롯한 맛있다고 하는 생수를 전부 사용해 봤다.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다 정수기 필터를 두 개 장착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카페 사장님의 대화 중에 물의 약산성(pH 6.5~7.0 맛을 결정한다는 말에 얻은 힌트였다. 그래서 일본은 물맛이 좋아 육수도 간장도 술도 맛있다. 필터를 달아 바꾼 물은 확실히 부드러웠고 맛도 정제됐다. 결국 누구나 아는 타레 레시피를 기본에 기본으로 충실하게 만들었다. 라멘 스프의 맛이 확실히 달라졌다.


한국은 반찬과 국물, 면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일본처럼 짠 온소바가 아니라, 마시는 스프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 그래서 나는 스프에 집착했고 그 집착은 기본으로부터 완성됐다. 타레의 틀을 완성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 희열이란 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내게 고백했다. 장인이 되기로. 이것을 나의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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