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압니다. 이제..
족보와 구지봉의 비밀
나는 오래된 책을 만지작거렸다. 방 한구석, 낡은 서랍장에서 나온 족보였다. 황갈색 표지가 세월의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김해 김 씨 삼현파 중파(中派).” 검은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아래 조그맣게 새겨진 ‘가승보(家乘譜)’라는 단어가 묘한 압박감을 주었다. 책을 펼치자, 구불구불한 붓글씨가 기나긴 뿌리를 따라가듯 이어졌다. 첫 장에는 김관(金管)의 이름이 등장했다.
“판도판서를 역임한 조상님이라더니…”
어머니가 가끔 이야기하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언제나 칭송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족보는 단순한 이름 목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름들 사이에 적힌 몇 줄의 기록이 마치 흘러간 인물들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김관, 김극일, 김일손, 김대유. 삼현(三賢)이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어느 순간 입을 닫았다. 마치 금기라도 건드린 듯 조용해졌다.
그날 밤, 족보를 들고 잠들었을 때, 묘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구지봉에 서 있었다. 거북 모양의 산 아래, 어두운 숲 속에서 한 무당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무당은 한 손에 붉은 천을, 다른 손에 족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족보 속 이름만 보지 말고, 그 사이를 읽어라. 삼현파의 마지막 장, 김관의 흔적을 따라가라.”
나는 깜짝 놀라 졸린 눈을 비볐다. 족보는 여전히 내 품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책의 한 구석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방식으로 닳아 있었다. 그 부분을 펼치자 낯선 한자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구지봉, 숨겨진 실.”
며칠 뒤, 나는 족보에 얽힌 이야기를 더 듣고자 먼 친척 어르신을 찾아갔다. 노인은 족보와 함께 구지봉에 얽힌 전설을 알고 있었다.
“김관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공적을 남긴 조상님이 아니야. 그는 신령과 맞닿았던 사람이었지. 신령과 인간 사이의 통로 말이다.”
노인의 말에 나는 속으로 비웃고 싶었지만, 얼마 전 꿈속에서 본 무당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신령과 인간의 통로라니. 그런 얘기가 정말로 존재할까?
“족보는 기록된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안엔 너희 가문만의 신명(神明)이 숨겨져 있어. 김관이 그것을 알고 있었지. 신령이 선택한 자만이 족보의 비밀을 풀 수 있어.”
“그 비밀이 뭔데요?” 내가 묻자, 노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라면 알게 될 거야. 조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싶다면 말이야.”
며칠 뒤, 나는 구지봉을 찾았다. 족보를 들고 산길을 걸었다. 족보 속 이름들은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숲 속에 들어서자 꿈에서 본 무당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손에 붉은 실을 들고 있었다.
“삼현파의 족보는 단순히 너희 가문의 역사가 아니라, 신령과 인간이 엮어낸 기록이다. 김관의 이름 옆엔 언제나 공백이 있지. 그 공백이 네가 풀어야 할 비밀이야.”
그녀는 내게 실을 건네주었다. 실은 삼 줄이었다.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듯, 강하고 질긴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실로 족보를 묶으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김관이 족보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지. 그 실은 너희 가문의 연결을 상징해. 하지만 그것을 푸는 건 너의 몫이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족보를 다시 펼쳤다. 이번에는 다른 눈으로 그 페이지를 읽었다. 김관의 이름 아래 작은 글자가 보였다. ‘구지봉의 신명, 세대를 넘어 인간과 신을 잇다.’
나는 깨달았다. 족보는 단지 가문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과 신명이 서로 얽히고설킨 이야기였다. 김관은 그걸 알았고, 그 흔적을 남겼다. 나는 그날 이후, 족보를 단순한 가족의 기록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내 가문만의 비밀이자, 신령과 연결된 실이었다.
내가 그 실의 끝을 잡은 순간,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