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나는 백연희 이사의 ‘가족사냥’에 대한 수정 요구 사항을 내 의견인 것처럼 창한에게 전달했다.
“취재요?”
“이런 싸이코패스 보험 설계사가 진짜로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취재를 안 하고 쓴 거야?”
“아니요. 사실은 제가 예전에 잠깐 보험 설계사로 일했거든요. 취재는 따로 안 했고 그 때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냥 보험 설계사 말고 싸이코패스 보험 설계사는?”
“그.. 그건.. 글쎄요.”
“보험 설계사는 왜 한 거야?”
“예전에 임 감독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 있잖아요. 글은 발로 쓰는 거고 작가는 살인 빼곤 다 해봐야 한다고요. 보험 설계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을 썼는데 보험 설계사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취재도 할 겸 다녀봤어요.”
임 감독이 강탈한 창한의 시나리오 공모전 최종심 진출작 ‘악녀사냥’은 싸이코패스 보험설계사가 친부모를 죽여서 보험금을 타 내는 이야기다. 그런데 창한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보험금을 탔다고 하지 않았나? ‘악녀사냥’과 ‘가족사냥’ 둘 다 보험 설계사가 주인공이다. ‘가족사냥’의 완성도가 ‘악녀사냥’에 비해 훨씬 업그레이드 된 걸 보니 보험설계사로 일했던 경험이 도움이 된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악녀사냥’은 친부모를 죽이는 보험 설계사가 주인공이고‘가족사냥’은 ‘남의 집 가장’을 죽이는 보험 설계사가 주인공인데.. 창한은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보험금으로 먹고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보험금을 타겠다고 부모님을 죽인 건 아니겠지? ‘악녀사냥’에 나온 주인공의 범행 수법은 그대로 실행에 옮기면 완전범죄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치밀하고 현실적이었다.
혹시 임 감독에게 ‘악녀사냥’을 뺏기고 작가 데뷔의 꿈이 물거품이 되자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긴 게 아닐까? 만약 이번에도 ‘가족사냥’으로 작가 데뷔의 꿈이 물거품이 되고 또 다시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긴다면 가족을 뺏기고 살해당하는 ‘남의 집 가장’은 어쩐지 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시나리오가 수정될 때마다 점점 더 극 중 살해당하는 ‘남의 집 가장’의 디테일이 나와 비슷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가능할 것 같아요. 감독님.”
생각하면 할 수록 쎄 한 가운데 창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가능해? 진짜 싸이코패스를 모티브로 삼은 실화 느낌으로?”
“네.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그 때 같이 일했던 설계사 분들 중에 종종 그런 것 같은 분들이 있었어요. 그 분들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고쳐볼게요.”
나는 진짜 싸이코패스 같은 느낌으로 고치라는 게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뭘 알겠다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 그나저나 글은 어디서 써?”
“집에서요.”
“집에서 잘 써져?”
“그럼요. 어떻게든 쓰면 써져요. 혼자 살아서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요.”
“화려한 싱글이군. 부럽네.”
바로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유정이었다. 내일 세미가 영화 오디션에 참석해야 하는데 지방이라 어린 애 혼자 보내기 불안하니까 나보고 데려다 주라는 것이다. 짜증이 밀려왔다. 가뜩이나 배우를 하겠다고 설치는 것도 짜증나는데 뒷바라지까지 하라고?
“나도 바빠. 내가 노는 줄 알아?”
“애를 그 먼 데까지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아 시끄러! 내가 매니저야? 그냥 다 때려치우라고 해!”
“딱 하루만 부탁할..”
유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하지 말라는 걸 기어이 하려는 세미를 생각하니 현기증이 났고 눈 앞이 캄캄해져 찬찬히 숨을 고르고 있는데 창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엿들어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답답한 차에 마침 잘 됐다 싶어 자초지종을 격정적으로 털어놓았다. 17년째 감독 지망생 동민에게조차 못 하던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창한에게는 머뭇거려지지가 않았다.
“감독님..”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네 형님. 형님과 따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데려다 줘도 될까요?”
“뭐?”
“지난 번에 인사는 했으니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따로 매니저를 구할 수도 없는 마당에 창한이라면 안심이었다.
“글 쓰느라 바쁠텐데 진짜 그래줄 수 있어? 이거 번번히 미안한데?”
“괜찮습니다. 제가 따님의 일일 매니저가 되겠습니다.”
고맙긴 했지만 막상 창한이 딸과 함께 있는 그림을 생각하자 ‘가족사냥’ 속 ‘남의 집 가장’의 딸이 싸이코패스 보험설계사에게 몸과 마음을 뺏기는 생각이 나서 왠지 모르게 찝찝해졌다. 하지만.. 창한이 잘 생기긴 했어도 설마 세미가 자기보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아저씨를 좋다고 하진 않겠지. 믿는다.
“감독님에게 이런 말씀 드리긴 좀 부끄럽지만 저 연기 코치도 가능합니다. 잠깐이지만 연기 학원도 다녔었거든요.”
“연기를 배웠어?”
“네. 정말 잠깐요.”
“배우 하려고?”
“아니요. 전 끼가 없어서 안 돼요. 연기를 할 줄 알면 대사 쓸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도움이 되든가?”
“조금은요. 적어도 배우들의 마음은 알 것 같았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함 해 봐.”
“혹시 원하시는 연기 있으실까요?”
“뭐든 잘 하는 걸로 해 봐. 이왕이면 자유연기로 부탁할게.”
창한은 전혀 빼는 기색 없이 실시간으로 독백 연기를 늘어놓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이 정도면 카메라 앞에서 각 잡고 하면 제법 쓸 만 할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데? 어디서 배웠어?”
“여기저기서 잠깐씩요.”
“잘 하네! 배우 해도 되겠는걸?”
“따님 오디션장에 모셔다 드리면서 대사 정도는 맞춰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따님이 원한다면요.”
“그건 뭐 알아서 해. 너무 열심히 봐 주진 말고. 난 솔직히 내 딸 연기하는 거 반대거든.”
“네 적당히 할게요. 감독님.”
“또 감독님! 형이라고 부르랬지.”
“네 형님.”
“그런데 정말 출연한 적은 없어? 배운 거 그냥 썩히긴 아까웠을 것 같아서.”
“정말 끼가 없고요 카메라 울렁증까지 있어서요. 전 작가가 좋아요.”
문득 조재웅 피디가 석 팀장을 무시하고 나에게 제출한 배역별 캐스팅 후보자 리스트에 있던 조단역 배우들 중 창한 닮은 꼴이 떠올랐다. 이름은 달랐지만 어쩐지 창한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연기 해 본 적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걸까? 숨기고 싶은 흑역사일 수도 있으니 더 이상 캐묻진 말자. 작가가 시나리오만 잘 쓰면 됐지.
백연희 이사의 수정 요구 사항과 세미의 일일 매니저 구인이 해결돼서인지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정에게 세미의 일일 매니저를 창한에게 부탁했다고 하자 반대까지는 아니어도 살짝 걱정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세미는 싫지 않다고 했다. 스무 살 가까이 많긴 하지만 잘 생긴 오빠가 포르쉐로 영화 오디션 장까지 모셔주고 대사도 맞춰주겠다는데 싫다는 게 이상할 것이다.
간만에 세미의 밝은 얼굴을 봐서 좋았지만 이러다가 무능한 40대 중반의 가장이 싸이코패스 보험설계사의 계략에 의해 가정 내에서 설 자리를 잃고 결국엔 살해당하는 이야기인 ‘가족사냥’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
맨날 죽상이던 세미는 창한과 함께 오디션을 다녀온 이후 얼굴이 확 피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창한에게 연기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틈만 나면 창한의 집을 들락거렸다. 창한과 세미의 1:1 강의면 못 배우게 했겠지만 배우 지망생 친구와 함께 배운다고 해서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집 안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 건 좋은데 세미의 매니저 노릇을 하느라 시간을 뺏겨 ‘가족사냥’ 집필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이 됐지만 창한은 글을 하루 종일 쓰는 것도 아니고 늦은 밤과 오전에만 쓰니까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로서의 나는 괜찮지 않았다. 세미가 창한의 집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창한에게 전화하면 언제나 세미와 함께 있다고 했다. 함께 연기를 배우는 친구와 셋이서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 슬슬 걱정이 됐다. 설마 별 일 없겠지?
딸 가진 아빠들의 영원한 고민이자 불안은 딸의 첫 경험이라던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이 언제 어디서 어떤 놈과 첫 경험을 치르게 될 지는 생각하고 싶지 조차 않았다. 그리고 그 상대로 세미보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창한은 절대로 아니었다. 창한에게 여자 친구라도 있으면 안심이 될텐데 지금은 ‘가족사냥’에만 전념하고 싶다며 얼마 안 되는 썸도 다 정리했다고 해서 더 걱정이었다. 썸을 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안 타고 있는 게 이상했을 것이다. 젊고 잘 생겼고 돈도 많고 데뷔는 못 했지만 글도 잘 쓰고 차도 포르쉐니까.
아무리 뜯어봐도 완벽 그 자체인 창한에게 묘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거의 이중인격자 수준이었다. 간혹 마주치는 호프집 아줌마나 발렛 파킹 아저씨 또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 등에겐 그렇게 차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창한을 상대할 땐 묘하게 저자세였고 두려워하는 눈치까지 느껴졌다. 창한은 그들을 하대하지 않았고 꼬박꼬박 존대말을 썼지만 창한의 존대말은 묘하게 반말같은 느낌이 있었다. 창한과의 관계가 감독님과 작가여서 천만 다행이었다. 창한을 갑이나 적으로 만나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창한의 일일 매니저 노릇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을 기세였다. 세미가 영화 오디션에 덜컥 합격해버렸기 때문이다. 기분이 묘했다. 막상 세미가 주연으로 캐스팅됐다고 하니 내가 세미의 가능성을 몰라본 건 아닌지 애매해졌다. 혹시 미래의 탑스타를 내가 몰라본 걸까?
세미의 데뷔작이 될 독립영화의 크랭크인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감독이 리허설을 중요시 여긴다며 자주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고 걱정도 돼서 감독 이름을 검색해보니 지방대 영화과 강사였다.
미국 유학 생활을 오래 했고 한국에서의 경력은 단편 영화 몇 편 연출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번듯한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었고 관상을 보아하니 양아치나 사기꾼 같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돈 좀 있는 집 아들 같아 안심이었고 문득 이 감독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지 궁금해서 세미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감독님이나 제작진한테 아빠 얘기 한 적 있어?”
“아니? 전혀!”
“그래 잘 했다. 아빠가 조만간 탑스타 나오는 차기작 찍으니까 그거 기사나면 얘기하든가 하고 혹시 그 전에 아빠 뭐 하시냐고 물어보면 조그만 개인 사업한다고 해.”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