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망 감독에서 긁지 않은 복권 같은 감독으로 업그레이드

062.

by Zinn


세미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촬영장에 오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빠가 가면 안 돼?”


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괜히 한 번 긁어봤다.


“아 진짜! 오지 마라! 분명히 말했다!”


세미는 촬영장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조금 서운했다.



***



세미가 출연하게 된 독립영화의 로케 장소가 주로 지방 이곳 저곳이어서 세미 혼자 촬영장에 보낼 수는 없기에 창한이 촬영 끝날 때까지만 로드 매니저로 나서 주기로 했다. 창한은 마침 각색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이니 머리도 식힐겸 매니저 일을 마무리 짓겠다고 했고 조건은 단 하나였다. 나중에 세미가 스타가 되면 자신의 영화에 꼭 출연해달라는 것이다. 세미는 수줍은 얼굴로 약속해주었는데 마치 연인의 프로포즈를 수락하는 느낌이어서 보고 있기가 영 불편했다.


하지만 이제와 둘을 떨어뜨려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미의 주장에 의하면 창한 덕분에 연기력이 많이 향상됐다는 것이다. 창한이 알려준 메소드 연기법이 그 어떤 학원에서 배운 강의보다도 도움이 되고 그 날 오디션에 합격한 것도 창한이 대사를 맞춰준 덕분이라는 것이다.


너무 창한 얘기를 많이 해서 짜증이 났지만 배우의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지 히스테리가 줄었고 집 안 분위기도 화기애애해진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촬영 준비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창한의 작품을 도둑질했다는 양심의 가책도 점점 희미해졌다. 설령 들킨다 해도 가족 같은 사이가 됐으니 용서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니맨도 잠잠하고 이제 영화를 잘 찍는 일만 남았다.


강 대표도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차민오의 왼팔 백연희 이사와의 미팅 이후에는 각본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 야욕은 감히 드러내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철이 없어도 명색이 대표인데 캐스팅이 무르익어가는 이 중요한 타이밍에 숟가락을 얹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듯 했다. 석 팀장이 직언을 했는지 괜히 각본 크레딧을 욕심내다가 감독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캐스팅이 무산되기라도 할까봐 조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비록 데뷔작이 처절하게 흥행에 실패한 폭망 감독이지만 탑스타 차민오와 캐스팅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이라는 소문 하나 만으로 폭망 감독에서 긁지 않은 복권 같은 장래가 유망한 감독으로 신분이 업그레이드 됐다. 하루에 한 두 건 정도 울리던 핸드폰이 저녁마다 나를 찾는 술자리로 바쁘게 울려댔고 특히나 매니저들은 어떻게든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역시 남자는 의전이다. 굳이 영화를 만들지 않아도 계속 이렇게 감독 대접만 받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내가 촬영 준비 아니 감독 놀이 하느라 바빠 집을 비운 동안 창한은 내 빈 자리를 치고 들어왔고 유정과 세미의 입에서 창한의 얘기가 나오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일단 창한이 귀찮은 일을 다 도맡아줘서 편리했고 보험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싸이코패스일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작가가 글만 잘 쓰면 됐지 나한테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 아무 상관 없었다. 무엇보다 백연희 이사의 진짜 실화처럼 수정해달라는 요구 사항만 잘 반영해서 차민오 캐스팅만 성사시켜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시나리오는 창한이 알아서 잘 써주고 있으니 난 지금처럼 감독 놀이를 즐기다 나중에 영화만 잘 찍으면 되겠다 싶던 중 임 감독 장례식장에서 봤던 형사에게 연락이 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만나달라는 것이다. 형사는 영화사 앞으로 찾아왔고 내 데뷔작을 봤다며 반가운 척을 했다.


“감독님 영화 잘 봤습니다! 알고 보니 예전에 본 영화더라고요.”

“어디서요?”

“모텔에서 여자 친구랑요.”

“여자 분들은 보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네. 솔직히 제목 때문에 보기 싫다고 했는데 막상 보니까 재밌어 하더라고요.”

“아 다행이네요.”


내 영화를 좋아한다니 갑자기 형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악녀사냥’이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구해줄 수 있으실까요?”

“그거야 영화를 보시면 될 텐데요?”

“영화 말고 시나리오요. 영화화된 버전이랑 다른 초기 버전이 있다던데요?”

“누가 그런 말을 해요?”

“임 감독 따님에게 들었습니다.”


은조가 형사에게 별 소리를 다 했구나. 창한이 아빠를 자살시킨 싸이코패스 살인마라고 나에게 주장했듯 형사에게도 제보한 것이다. 형사는 최근에 혹시 수상한 사람이 접근하진 않았냐고 재차 물어보았다. 그런 거 없고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냐고 답답해하자 사실은 임 감독 자살 사건에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디테일이 있는데 임 감독의 '악녀사냥’에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임 감독이 죽기 전에 ‘악녀사냥’의 초기 버전을 쓴 작가를 만났다는데 혹시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접근하면 꼭 연락달라고 했다.


순간 소름이 끼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임 감독은 창한을 갈굴 때 항상 진짜를 강조했었다. 등장인물 중에 싸이코패스가 있다면 진짜 싸이코패스를 만나서 취재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싸이코패스를 취재할 방법이 없으니 창한은 뭘 써오든 임 감독에게 갈굼만 당했다. 만약 그 때 창한이 진짜 싸이코패스를 취재하는 대신 본인이 싸이코패스가 된 것이라면? 아니면 감추고 있던 싸이코패스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면?


형사와 헤어지고 나서도 묘하게 찝찝했고 이러다 ‘악녀사냥’이 현실화 된 것 처럼 ‘가족사냥’이 현실화 되어 내가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집에 와 보니 창한이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집 안 분위기가 화기애애 그 자체였다. 창한은 이제는 세미에 이어 유정과도 친해진 듯 했다. 어쩐지 창한이 아니라 내가 손님이고 유정과 세미도 나보다 창한을 더 따르는 분위기였다. 설상가상 창한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세미가 빤스나 다름없는 짧은 핫팬티를 입고 있는 걸 보자 현기증이 났다.


“야 너 바지가 그게 뭐야? 설마 팬티만 입은 거야?”

“아 존나 짜증나! 아빠 미쳤어?”


나도 한 때는 딸 바보 였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어느덧 망나니가 되어 아빠에겐 땍땍거리지만 잘 생긴 오빠에게는 나긋나긋한 것도 불쾌했다. 나의 지난 인생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핫팬츠를 지적했다가 괜히 관계만 더 악화됐고 창한 덕분에 집 안 일에 대한 수고는 덜었지만 내 자리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



세미가 독립영화에 캐스팅 된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차라리 영화가 엎어지면 좋겠는 와중에 크랭크인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스타가 될 지도 모르는 내 딸의 첫 촬영이니 현장 분위기가 궁금해서 촬영장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세미가 절대로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 창한에게 틈틈이 보고를 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늦은 오후쯤 창한으로부터 세미가 첫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고 연락이 왔다.


세미는 이게 다 창한 덕분이라고 고마워했다.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번 영화 촬영이 끝나면 집 안에서 나의 입지는 완벽하게 창한과 역전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가족사냥’에서 가족을 뺏기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이 되는 것 까지는 몰라도 세미는 창한에게 빼앗기게 될 것 같았다. 눈 뜨고 당할 순 없다.


창한을 불러내 백연희 이사의 수정 요구 사항들은 잘 반영되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창한은 거의 다 됐다고 했고 나는 그렇다면 다 쓸 때까지만이라도 세미의 매니저 일을 쉬라고 했다. 창한은 이제 막 촬영을 시작했는데 앞으로는 누가 세미를 촬영장에 데려다 주냐고 물었지만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고 시나리오나 열심히 쓰라고 경고했다. 창한은 잠깐 고민하더니 무슨 말씀인지 알았다며 최대한 빨리 써서 넘겨드리겠다고 하고 집으로 갔다.


창한은 매니저 해고 통보에 순순히 알았다고는 했지만 어째 표정이 쎄한 게 뒤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세미도 이 사실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솔직히 얘기하면 이해해주겠지.


창한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데 실로 오랜만에 혜나에게 카톡이 왔다. 카톡 창을 열어보니 혜나의 연기 연습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섬네일만 봐선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보낼 거면 그냥 사진이나 보내지 동영상을 확인하려니 귀찮아서 확인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클릭했더니 침대에 앉아 속이 훤히 비치는 야시꾸리한 란제리 차림으로 ‘가족사냥’의 대사를 읊고 있는 혜나의 셀프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누가 볼까 무서워서 얼른 꺼버렸다. 막말로 연기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불콰한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침대 옆 선반에는 빈 와인 병이 놓여 있는 걸 봐선 혼자서 한 잔 걸친 듯 했다. 설상가상 란제리 차림이어서 누가 보면 나와 혜나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오해를 받기 딱 좋은 동영상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캐스팅을 시켜주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협박이다. 구두 약속은 이제 무의미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계약서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석 팀장에게 혜나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얘기했다간 또 혼날 게 뻔하다. 동영상을 다 보고 나니 뒷목이 땡기고 두통이 밀려왔다.


답은 하나 뿐이다. 하루 빨리 17년째 감독 지망생 동민의 단편영화 프로젝트를 가동시켜 혜나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고 촬영이 끝나기 전에 연애로 발전시켜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에서 은퇴하는 시나리오다.


당장 동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민은 언제나처럼 금방 받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내가 할 말 있으니 내일 저녁에 잠깐 사무실 근처로 놀러 오라고 했더니 동민은 다음 주 마감인 시나리오 공모전에 낼 작품을 집필 중이어서 안 된다고 했다.


“뭐 쓰는데? 내가 앞으로는 시나리오 새로 쓸 때 아이템 컨펌 받고 쓰라고 하지 않았냐?”

“닥쳐.”

“설마 지난 번에 냈던 거 대사만 조금 고쳐서 또 내는 건 아니겠지?”

“흠흠..”

“그래. 잘 생각했어.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은 아직 네 시나리오를 못 봤거나 마음에 들어할 수도 있으니까. 이제 그만 미련을 버리라는 말은 안 할게. 대신 네가 먹고 싶은 거 사 줄 테니까 잠깐 놀러 왔다 가.”

“무슨 할 말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불안한데?”

“불안은 무슨.. 그럼 내일 보는 거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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