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다음 날 오후, 사무실에서 동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강 대표가 저녁 일정 있냐고 물어봐서 동민과의 약속은 캔슬해 버렸다.
기껏 시나리오 공모전에 낼 시나리오를 집필하느라 바쁘다는 걸 내가 먼저 보자고 약속을 잡아놓고 당일에 캔슬해버리니까 동민은 황당해하는 눈치였으나 강 대표와의 저녁이 더 중요하므로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맛있는 거 사주면 되지 뭐. 그렇게 강 대표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서연에게서 카톡이 왔다.
‘퇴근 후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사무실이면 내 방으로 와서 얘기하면 될 것을 어디 갔나 확인하려고 슬쩍 유리문 너머로 보니 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열심히 일하는 줄 알 것이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니 서연의 자리로 가서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카톡으로 말을 걸었으니 카톡으로 답을 보냈다. 은근 스릴 넘치는 게 비밀 리에 사내연애 하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 있어?’
‘말씀드린 시나리오 거의 다 썼거든요. 봐 주실 수 있나 해서요.’
‘그래 보내줘. 강 대표가 밥 먹자고 해서 나가려는데 이따 끝나고 바로 읽어볼게.’
‘그럼 이따 끝나고 톡 주세요. 그 때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모니터 말고도 부탁이 있어서요.’
‘무슨 부탁?’
‘식사 마치시고 톡 아니 전화주실래요? 아니다 그냥 내일 말씀드릴게요.’
‘무슨 얘긴데 말을 하다 말어?’
‘내일요.’
서연은 꼭 이런 식이었다. 먼저 말 꺼내놓고 궁금하게 만들기. 예쁘지만 않았으면 진짜 얄미운 스타일이다. 하지만 안 예쁘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내일 알게 될 테니 서연의 부탁에 대한 궁금증은 접어두고 강 대표를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강 대표는 나를 회사 근처 오마카세 일식집으로 데려가 비싸 보이는 사케와 오마카세 풀코스를 먹인 후 더 좋은 곳으로 모시겠다며 또 다시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했다.
“아니 늦었는데 어디를 가시려고요?”
“있어요. 제가 귀여워하는 동생이 하는 가게니까 부담갖지 않으셔도 돼요.”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얘기만 들어도 부담이 됐다. 분명 여자 나오는 가게일 것이다. 강 대표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다른 때였으면 혹 했겠지만 이걸 넙죽 받았다간 강 대표를 ‘가족사냥’의 작가 크레딧에 올려주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의 빚이 생길 지도 모른다. 강 대표는 취했는지 슬슬 말이 짧아졌다.
“잠깐만 기다려 감독님. 내가 동생보고 여기로 데리러 오라고 했거든. 금방 올 거야.”
강 대표만 혼자 놔두고 나올 수가 없어 망설였는데 누가 온다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강 대표가 화장실에 간 사이 집에 일이 있다며 잽싸게 가게에서 도망나와 버렸다. 집에는 알아서 가겠지. 고작 접대 따위로 작가 크레딧을 넘겨줄 순 없다. 데뷔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시계를 보니 9시 반이었다. 서연에게 전화를 걸어보려다 혹시 시나리오를 보냈나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서연으로부터 새로운 메일이 와 있었다. 곧장 집에 가긴 싫었는데 마침 잘 됐다. 후딱 읽고 시나리오 모니터 핑계로 불러내면 되겠다싶어 얼른 사무실로 돌아와 서연이 보낸 시나리오를 출력해서 읽어 보았다.
충격이었다. 술이 확 깼다. 서연이 나를 롤모델로 삼아 썼다는 시나리오 속의 감독은 찌질하기 짝이 없는 폭망 감독으로 희화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이렇게 찌질해 보였단 말인가? 비굴하고 무능하고 추접했다. 읽는 내내 불쾌했고 다 읽고 나서도 불쾌했지만 웃어 넘길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착한 감독 코스프레 하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이 타이밍에 화를 내 버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서연이 아직 어려서 그러려니 했지만 시나리오를 다 읽고 한참이 지나도 생각하면 할 수록 괘씸했다. 기껏 고민 상담도 해 주고 평소 팬이라는 감독의 독립영화 시사회도 데려가줬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고. 나를 이런 호구 병신 찐따로 보고 있었다니 두고 보자. 내가 보란듯이 대박 감독으로 거듭나서 반드시 복수 하고야 말겠다.
더 짜증나는 건 시나리오가 재밌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면 서연의 재능없음을 불쌍히 여길 수도 있겠는데 너무 재밌었다. 극중의 폭망 감독 캐릭터가 실제 폭망 감독 최경진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서인지 디테일이 압권이었다. 하지만 그게 나랑 뭔 상관이람?
이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고 흥행에 성공한다고 나한테 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극중 폭망 감독 롤모델이 ‘꼴리는 영화’의 최경진 감독이라는 소문이 났다간 개망신만 당할 것이다. 인터뷰를 허락해주는 게 아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서연과 나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우리 사이에 뭔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서연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지금까지처럼 착한 감독 코스프레를 유지할 자신이 없던 와중에 카톡이 울렸다. 서연이면 어떡하나 심쿵했는데 재웅이었다. 서연의 시나리오 모니터를 해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기 시나리오도 모니터를 부탁한다며 한글 파일을 내 허락도 없이 카톡으로 전송한 것이다.
다른 때 같았음 확인조차 안 했겠지만 마침 사무실이고 서연의 시나리오를 읽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망연자실하고 있던 와중이어서 별 생각 없이 첫 페이지를 열어 봤는데 오프닝부터 서울 하늘에 몬스터가 출몰해 지하철을 파괴하고 승객들을 공격하는 씬이었다. 딱 봐도 제작 가능성이 희박한 판타지 대작이어서 딱 한 페이지만 더 읽고 덮어버렸다. 만약 어떻게 보셨냐고 물어보면 감독이나 작가 데뷔 같은 허튼 생각하지 말고 밀리언 필름이 망하거나 짤리기 전까지는 열심히 다니라고 해야겠다.
양서연 피디에 대한 배신감에 마음이 공허해지며 갑자기 석 팀장 생각이 났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다. 이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건 나의 오랜 친구 석 팀장 뿐이다. 석 팀장이라면 어쩐지 오늘 밤 뭔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고 밤이 늦었지만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동민에게 전화가 왔다.
“왜?”
“어디냐?”
내가 아직 사무실이라고 하자 지금 바로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다. 지금 만나고 싶은 건 동민이 아니라 석 팀장이지만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해 놓고 저녁 약속을 캔슬한 죄가 있고 이렇게까지 만나고 싶어하는 걸 거절하기도 미안하고 정작 석 팀장이 안 만나줄 수도 있으니 얼른 오라고 했다. 차라리 잘 됐다. 혜나를 주인공으로 한 독립영화를 만들라고 제대로 설득하려면 한 번쯤은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감독님이라고 유세 떠냐? 만나기 드럽게 힘드네.”
바람도 쐴 겸 회사 근처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동민이 멀리서부터 투덜거리며 다가오더니 맞은 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법카를 주면서 먹고 싶은 걸 사오라고 했더니 캔 맥주 두 개와 새우깡을 사왔다. 약속을 캔슬한 대가로 맛있는 걸 사주려고 했는데 이걸로 퉁치려니 좀 미안했지만 우린 뭐 친구니까.
“공모전 준비는 잘 돼가고?”
“그럭저럭.”
새로 쓴 시나리오를 내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시나리오를 몇 번을 내는 거냐! 그 정도면 재능이 없는 거니까 이제는 그 놈의 공모전에 미련을 버리고 다른 일 찾으라고 말 하려다가 이런 얘기를 한 두 번 한 것도 아니고 말해 봤자 입만 아플 것 같아서 참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너 혜나씨랑 잤냐?”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동민이 혜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니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해 줄까 생각 했지만 그건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잤다고 말하는 건 혜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고 혜나를 주인공으로 한 독립영화 연출을 시작으로 연애로 발전시켜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에서 은퇴시키려는 계획에 방해가 될 게 뻔했다.
“아우 그만 좀 물어봐. 지겨워 죽겠네.”
“감독과 배우를 떠나 유부남이 그래도 되냐?”
“유부남이긴 하지만 다 큰 성인 남녀끼리 몇 번 잔 게 불법은 아니잖아?”
“몇 번? 한 두번 잔 게 아니야?”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안 잤다는 게 중요하지. 왜 자꾸 물어보는 거야? 진짜 지겨워.”
“맹세할 수 있어?”
“안 잤다고.”
“엄창?”
“장난 하냐? 진짜 안 잤어!”
“가족들 목숨 걸고?”
“목숨은 못 걸지. 하여간 안 잤으니까 믿기 싫음 말구.”
혜나와 안 잤다고 끝까지 부인하니까 순순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안 잤다고 말해줘서 고맙다.”
오늘따라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동민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야..”
“왜?”
“미안하다 임마.”
“뭐가?”
“네가 혜나씨를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지. 내가 밀어줄게.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셋이서 자리 한 번 만들어봐?”
“에이.. 괜찮아.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야.”
동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바로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너 말 잘 했다! 그렇지! 그게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지! 잘 알고 있네?”
“뭔 소리야?”
“셋이서 억지로 자리 만들고 내가 아무리 밀어준들 아무 소용 없다고.”
“나도 알아. 누가 뭐래?”
“하지만 감독과 배우의 관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단편영화 얘기면 그만 해라.”
“단편영화가 답이야. 장난하는 거 아니니까 너도 진지하게 생각해봐. 내가 오죽하면 이런 제안까지 하겠냐. 천년만년 시나리오 써봤자 아무도 너 입봉 안 시켜줘. 이젠 너도 알잖아? 하지만 단편영화라면 달라. 사람 일 모른다고 칸느 같은 데서 상을 받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러면 감독 데뷔도 수월해지잖아. 물론 무조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구석에서 시나리오만 쓰는 것보단 훨씬 희망적이지. 그리고 니가 만든다고만 하면 혜나씨는 내가 책임지고 캐스팅 해 올게!”
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동민도 마음이 동하는 눈치였다.
“그래주면 고맙긴 한데..”
“나만 믿고 넌 연출에만 전념해. 단편 시나리오 한 두 개쯤은 있겠지? 없으면 새로 쓰고.”
동민의 썩은 동태 눈동자 같던 눈빛에 간만에 총기가 돌았다. 어지간히 혜나가 좋은 모양이었다.
“고맙지?”
“알았어.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고마우면 부탁 하나만 하자.”
“응. 해 봐.”
“혜나씨 좀 진정시켜주면 안 될까? 얼마 전부터 반쯤 협박을 당하고 있거든. 이번 작품 캐스팅 안 시켜주면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은 분위기야.”
동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잤으면 뭐가 걱정이야?”
“걱정은 안 하지. 안 잤으니까.”
“니가 걱정해야 할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또 있어?”
“그 시나리오 정말 니가 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