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뜨끔했다. 만들라는 단편영화는 안 만들고 이건 또 뭔 소리야?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려고 했지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냥 웃어 넘길 순 없었다.
“말을 이상하게 한다? 내가 표절이라도 했다는 거야?”
“네가 그럴 놈은 아니잖아. 그건 아니고 예전에 봤던 시나리오랑 비슷한 것 같아서.”
“그거야 당연하지.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딨냐. 따지고 보면 다 어디선 본 거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니까 하는 소리지.”
“갑자기 짜증나네.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온 거냐? 그렇게 심심해?”
“아님 마는 거지 왜 오바하고 그래?”
“아니다. 그래. 미안하다! 너는 17년 동안 감독 준비 중인데 내가 차기작 들어가는 꼴을 보려니 배알이 어지간히 꼴렸나보네.”
“됐다. 나중에 진정되면 다시 얘기하자.”
“뭔 얘기를 다시 해. 다시 볼 일 없으니까 꺼져! 그리고 너 행여나 어디 가서 그 딴 소리 지껄이지 마라.”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나는 씩씩거리며 플라스틱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예전에 봤던 시나리오랑 비슷한 것 같다는 얘길 들은 순간부터 너무 당황해서 내 정신이 아니었는데 사무실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게까지 화 낼 일은 아니었다. 이래저래 요즘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나도 모르게 동민에게 화풀이를 한 느낌이었다. 조금 미안했지만 친구끼리 미안할 게 뭐 있나.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면서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궁금해졌다.
‘가족사냥’이 예전에 봤던 시나리오랑 비슷하다고?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올 게 아니라 그 시나리오가 뭔지 물어봤어야 했다. 동민도 내가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오버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빨리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한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전화할까 그냥 지금 전화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창한이 카톡으로 수정고를 보내왔다.
대충 읽어보니 뭔가 고치긴 한 것 같은데 하도 많이 읽다보니 어디를 어떻게 고쳤는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다음부터는 수정한 부분만 파란 색으로 체크하라고 해야겠다. 마치 진짜 싸이코패스를 취재해서 쓴 것처럼 잘 고쳤겠지? 믿어야지 뭘 어쩌겠어. 내가 고칠 것도 아니니 다시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곧장 석 팀장에게 창한의 수정고를 전달했다.
***
다음 날 점심. 밀리언 필름 출근과 동시에 석 팀장이 할 말 있다며 감독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웬일이니! 캐릭터가 훨씬 더 좋아졌잖아?”
“아이 씨 할 말 있다고 해서 놀랐잖아. 더 고칠 건 없고? 니가 볼 땐 그 놈의 진짜 어쩌구가 반영된 것 같아?”
“당연하죠 감독님! 실화인줄 알았을 정도야. 더 고칠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이미 연희에게도 보내놨어. 아 백 이사.”
“그래 백 이사는 뭐해?”
“잘 본 것 같아.”
“벌써 다 읽었다고?”
“당연하지. 민오한테도 보냈대. 우리 최 감독 글은 가독성이 좋잖아. 연희 말로는 캐릭터가 딱 지금 민오에게 필요한 스타일이래. 연기 변신이 절실한 타이밍이거든. 그리고 별 기대 없이 얘기한 수정 사항들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어서 놀랐다나봐. 남은 건 민오야. 민오가 읽어보고 감독 만나겠다고 하면 천재지변 급의 이변이 없는 한 캐스팅은 확정인 셈이야.”
“괜찮을까?”
“자신 있으니까 민오에게 보냈겠지. 아마 지금 쯤이면 다 읽었을 수도 있겠네.”
“설마 그럴 리가. 민오 정도 되는 탑스타가 읽으란다고 바로 읽는다고? 반나절도 안 지나서?”
“그러니까 연희가 차민오의 왼팔인 거지. 아무리 바빠도 연희가 읽으라는 시나리오는 바로 읽는대.”
문득 백연희 이사가 차민오의 왼팔이면 오른팔은 누군지 궁금해졌지만 이 타이밍에 그런 걸 물어보면 또 감독답지 못하게 촐싹댄다고 난리칠 것 같아 애써 호기심을 억눌렀다.
사실 내가 괜찮을지 걱정인 건 ‘가족사냥’이라는 시나리오를 민오가 잘 봐줄 지가 아니라 감독이 최경진이라는 점이지만 굳이 부연 설명하지는 않았다. ‘꼴리는 영화’로 폭망 후 10년째 놀고 있는 최경진 감독이 과연 한 물 가기 직전이지만 아직은 한국 최고의 탑스타 카테고리에 속해있는 차민오의 차기작 감독으로 합격할 수 있을까? 베팅으로 치면 이보다 역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암튼 기다려 봐. 민오가 다 읽는대로 바로 피드백 올 거야.”
“고마워 석 팀장. 이게 다 석 팀장 덕분이야. 이번 영화만 잘 끝나면 죽을 때까지 명절마다 선물 싸들고 찾아뵙고 큰 절 올릴게.”
“또 까분다. 암튼 최 감독은 이제 잘 찍을 고민만 하면 돼. 그리고 나 한우 밑으론 안 받는다?”
이런 걸 두고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이라고 하나? 비록 데뷔하자마자 폭망은 했지만 10년 후 대박 감독으로 거듭나서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결말. 나를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는 석 팀장이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예뻐보였고 험한 꼴과 개망신으로 가득했던 지난 10여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찰나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라고 대답하자 한 템포 쉬고는 방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양서연 피디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 그 누구보다 예뻐보였던 서연이 더 이상 예뻐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만 보니 어리기만 하지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나이가 깡패였을 뿐 살짝 남상이라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했다간 서른만 돼도 역변할 조짐이 보였다.
“감독님 전화 왔는데요?”
“회사 전화로? 누군데?”
“여배우요. 혜나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석 팀장이 도끼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혜나? 혜나라는 배우가 있어?”
“그러게? 누구더라? 아! 내 전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같은데?”
“최 감독 영화에 그런 배우가 나왔었나? 왜 내가 모르지?”
혜나라는 이름의 여배우가 나를 찾는다는 소리에 석 팀장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내 작품을 봤으니 혜나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 굳이 모르겠다고 하는 걸 보면 폭망 감독이라는 내 사회적 지위를 재확인시키고 서연 앞에서 나를 망신주겠다는 의도 같았다. 탑스타 차민오와 미팅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듣보잡 배우들에게서나 전화가 오는 폭망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이겠지. 한 마디로 감독이랍시고 까불지 말라는 얘기다.
내가 회의 끝나고 전화하겠다고 전달을 부탁하자 서연은 “네 감독님.”하고 나갔고 석 팀장은 나를 한참을 째려 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방에서 나갔다. 무슨 막말을 쏘아댈 지 몰라 무서웠는데 지금은 석 팀장보다 혜나가 더 무서웠다. ‘가족사냥’ 캐스팅 요구에 대한 나의 피드백이 시원찮으니까 아예 영화사 사무실로 전화를 해 버린 것이다. 쿨한 미녀인줄 알았던 혜나가 이렇게까지 집착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줄은 몰랐다.
콜백이 늦어졌다간 또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불안했다. 한 시라도 빨리 전화해서 허튼 짓 못하게 달래고 싶은데 감독 방에서 전화 했다간 밖에서 통화 소리가 들릴까봐 미팅 있는 척 하고 짐을 챙겨 얼른 사무실 밖으로 나와서 전화를 걸었다.
싸늘하게 받을 줄 알았던 혜나는 예상 외로 매우 다정한 어투로 전화를 받았다. 근황 토크를 나눌 마음의 여유는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아직 캐스팅 단계가 아니라고 했고 혜나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그럼 희망 고문이라도 해 달라며 자신을 방치하지 말라고 했다. 안 챙겨주면 삐뚤어질 거라고 은근한 협박까지 덧붙였다. 이 정도면 막 나가자는 것이다. 혜나가 이렇게까지 작정하고 나오면 더 이상 기다리라고 말로만 때울 수는 없었다.
“나 못 믿어? 우리가 이 정도 사이 밖에 안 됐나? 이미 캐스팅 확정이니 걱정하지 말라구. 내가 감독인 거 잊은 건 아니겠지?”
캐스팅을 나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니 무책임 한 건 아니다. 나가리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미안하게 됐다고 다음 작품에선 어떻게든 챙겨주겠다고 약속해 주면 된다. 혜나도 이 바닥 하루 이틀 겪은 게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 했다는 걸 알면 악감정을 갖고 해코지를 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희망 고문이라도 원한 건 혜나 본인이다.
하지만 혜나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캐스팅 확정이라는 원하는 답을 들었으니 화기애애하게 잘 해 보자는 말을 나누며 전화를 끊을 줄 알았는데 혜나는 나가리 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가만 있지 않으면 어쩌려는 걸까? 두려움이 밀려와 불안 초조한 가운데 석 팀장에게 카톡이 왔다. 그럼 그렇지 석 팀장 성격에 이런 일을 보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정신 차려 미친 놈아. 감히 회사까지 전화가 오게 만들어? 꼴에 감독이랍시고 여배우나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리라 믿는다. 니가 삼류 듣보잡들이나 만나고 다니면 널 감독으로 인정한 나까지 그 수준으로 내려가는 거 몰라? 기껏 시나리오 잘 뽑아놓고 거의 다 왔는데 하차 당하고 싶은 건 아니지? 주변 관리 이 따위로 하면 시나리오를 아무리 잘 써도 더 이상 쉴드 못 쳐 준다. 그리고 뒷말 안 나오게 잘 처신해. 요즘 투자사에서 감독 뒷조사 얼마나 철저하게 하는 지 알지?’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어서 할 말이 없었다. 10여년간 온갖 험한 꼴 다 보고 이제야 불행 끝 행복 시작인데 탑스타도 아닌 듣보잡 여배우에게 발목을 잡힐 순 없는 노릇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지금은 혜나에게 희망 고문이 아니라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전달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후환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답은 하나다.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한시라도 빨리 동민과 자리를 만들어서 단편영화 제작에 착수해야 한다. 죽어도 안 만들겠다고 하면 제작비를 내가 대준다고 하자. 그러면 만들겠지. 17년째 감독 지망생 심동민이 연출하는 단편영화에 내 피 같은 돈을 갖다 바칠 생각을 하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미치도록 돈이 아까웠지만 보험금 또는 벌금이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될 것도 같았다. 결심을 굳히고 동민에게 연락하려는데 석 팀장에게 또 다시 카톡이 왔다.
‘민오 미팅 준비는 다 했어?’
‘무슨 준비?’
‘왜 이런 작품을 쓰셨어요?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기획 의도가 있을 거 아냐!’
기획 의도라..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어서 잘 모르겠는데? 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의도가 어딨어? 작가가 글을 의도가 있어서 쓰냐? 영감이 떠오르면 저절로 써지는 거지!’라고 카톡을 보내자마자 ‘최경진 감독님은 아직 그렇게 말해도 될 레벨은 아니시고요. 안 되겠다. 예상 질문을 뽑아볼 테니까 미팅 연습을 하자. 최소한 감독이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진 말아야지!’라고 답이 왔다.
‘농담이지? 신입 사원 면접도 아니고 무슨 연습을 해?’
‘경력 단절 10년이면 신입보다 못하지. 다음 작품 찍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