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065.

by Zinn


경력 단절 10년이라니..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비어 있다고 아무 일도 안 한 건 아니다. 캐스팅이랑 투자만 안 됐을 뿐 끊임없이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썼고 미팅과 회의를 반복 했으며 밑도 끝도 없이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다. 아무리 폭망 감독이어도 그렇지 그래도 한 편 연출한 기성 감독을 너무 듣보잡 신인 취급 하는 것 같아 다 때려 치우고 집에 가 버리고 싶었지만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까봐 꾹 참았다.


집에는 언제든 있을 수 있다. 조그만 더 참자. 경력 단절 10년이란 주장을 인정할 순 없지만 감독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면 안 된다는 말에는 백프로 동감이다. 배우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면야 그래서 캐스팅에 도움이 된다면야 미팅 연습이든 뭐든 얼마든지 해 주겠다. 이번 미팅 결과에 따라 다음 작품을 찍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채 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는 예상 질문지가 출력되어 있었다.


그런데 찬찬히 읽어보니 이건 내가 아니라 진짜 이 작품을 쓴 작가가 대답해야 할 질문들이었다. 석 팀장이야 ‘가족사냥’을 내가 쓴 줄 알고 있으니 이런 질문을 뽑아왔겠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럴싸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하다. 애초에 내가 쓴 작품이 아니니까.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으면 창한에게 기획 의도 등을 미리 물어봐둘 걸 그랬다. 책상 앞에 앉아 혼자서 낑낑대고 있어 봤자 답이 없으니 사무실 근처 카페로 나와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가와의 대화가 간절했다.


창한은 언제나처럼 금방 받았고 나는 다짜고짜 물어볼 게 있다며 석 팀장이 뽑아준 예상 질문들을 내가 궁금했던 것처럼 물어보며 통화 녹음 버튼을 눌렀다. 역시 원작자는 달랐다. 척하면 척이었다. 창한의 작가로서의 재능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작가님과의 대화를 마칠 때쯤 창한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 하는 눈치여서 한 마디 던져주었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차원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작품을 진행하다보면 분명 길을 잃을 때가 있을 거야. 그 때가 되면 지금 나에게 해 준 말들을 돌이켜봐.”


말하고 나니 뭔가 멋있는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에 으쓱해졌는데 창한은 여전히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뭐 어쩔 수 없지. 내가 생각해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뜬금 없을 것 같다. 창한은 글을 잘 쓰고 잘 생겼고 말도 잘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아닐까? 단지 재능이 없어서? 이유가 뭐든 결과적으로 나는 감독실격인걸까?


창한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자 서연에게 카톡이 왔다. ‘통화 가능하세요?’ 내가 시나리오 피드백을 안 주니까 답답한 듯 했다. 하지만 찌질하기 짝이 없는 폭망 감독 따위와 통화는 왜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진짜로 속이 좁거나 찌질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



이번 기획 회의는 내가 소집했다. 핸드폰으로 녹음해둔 창한의 대답들을 완벽하게 숙지한 후 석 팀장과 기획팀 앞에서 차분하게 브리핑 했다. 석 팀장 뿐만 아니라 기획팀 피디들이 모두 놀란 눈치였다. 나도 놀랐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 했던가? 진짜 감독이 된 기분이었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석 팀장도 놀랐는지 회의가 끝나고 감독 방으로 찾아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이제야 감독님 답네. 진작 이렇게 하지 그랬어! 이 정도 대답을 들으면 내가 민오여도 출연을 안 할 수가 없겠다. 감독에 대한 믿음이 절로 생기네.”


나를 바라보던 서연의 눈빛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그저 창한에게 고마울 뿐이다. 글도 글이지만 아마 감독도 창한이 나보다 더 잘 할 것이다. 창한이 감독이라면 망해가는 한국영화를 구원해줄 걸작이 탄생할 수도 있는데 내가 다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어쩔 수 없다. 한국영화가 망하든 말든 일단은 내가 살고 봐야 한다. 이번 ‘가족사냥’으로 창한에게 진 빚은 흥행 감독으로 거듭나서 파워가 생겼을 때 데뷔시켜주는 걸로 갚기로 하자.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싶어서 전화를 하려는데 석 팀장이 노크도 없이 감독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백 이사랑 통화했어.”

“뭐래?”

“민오가 읽었대.”

“진짜? 그래서?”

“글에서 뭔가 느껴지긴 했는데 감독을 봐야 알 것 같다고 했다나봐. 내일 만나자는데?”

“만나야지!”

“방금 전처럼만 하면 돼. 자신 있지?”

“당연하지.”


맨날 영화에서만 보던 한 때 한국 최고의 탑스타 차민오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꿈은 아니겠지? 글에서 뭔가 느껴졌다는 게 무슨 소린지 감이 안 와서 불안하긴 했지만 한국 최고의 탑스타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게 중요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최소 강남의 꼬마 빌딩 한 채 값 정도의 제작비를 책임져야 하는 감독이니까. 석 팀장은 빨리 집에 가서 내일 미팅을 위한 컨디션 조절에 전념하라며 나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



석 팀장의 차가 향하는 곳은 우리 집 쪽이 아니었다.


“우리 집 몰라?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집.”


석 팀장은 앞으론 정신 없이 바빠질테니 더 바빠지기 전에 둘이서 술 한 잔 하자며 자기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우리 사이에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딱히 할 말도 없는데. 석 팀장은 자신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근처 이자카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내 평생 네가 감독님으로 보인 건 오늘이 처음이야.”


석 팀장은 과거 임 감독의 작품에서 조감독과 스크립터로 함께 일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 놓았고 추억 팔이에 기분이 좋아졌는 지 잔에 가득 담긴 사케를 연이어 원샷했다.


나는 내일 미팅도 있으니 적당히 마시고 나가려는데 석 팀장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질 못했다. 집 근처라 별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몰라 부축해서 집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석 팀장은 오피스텔 현관 바로 앞에서 “잠깐 들어갔다 갈래?”라며 게슴츠레하면서도 끈적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대에서의 석 팀장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은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탑스타와의 미팅을 앞두고 부정 탈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갔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것 같았고 석 팀장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그럼.. 잠깐 들어가도 될까?”


석 팀장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편의점에 가서 캔 맥주를 사 오라고 했다. 나는 얼른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캔 맥주와 콘돔을 샀다. 정말 오랜만의 편의점 콘돔이었다. 그리고 석 팀장의 오피스텔로 들어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겁게 엉기며 섹스를 했다. 예전만큼 짜릿하진 않았지만 내가 이겼다는 쾌감이 밀려왔다.


석 팀장과의 길고 지리했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쾌감은 번개처럼 휘발되어 버렸고 이어서 현자 타임이 찾아왔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가족사냥’이 대박나면 석 팀장의 신생 제작사보다 더 멀쩡하고 번듯한 회사에서 차기작을 만들 수도 있는데 이번 일 때문에 발목이 잡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안 그래도 혜나 때문에 마음 고생 중인데.. 에이 아니겠지. 석 팀장은 그래도 사회적 지위와 나이가 있는데 설마 혜나처럼 철없이 굴진 않겠지.


석 팀장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섹스를 마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곤히 잠 들어있는 석 팀장의 얼굴에서 무상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 오피스텔 내부의 풍경도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화장대 겸 책상 하나와 오피스텔에 딸린 아일랜드 테이블 그리고 심플한 디자인의 이케아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이혼하고 혼자 산다더니 오피스텔을 근사하게 꾸며 놓고 살 마음의 여유는 없는 듯 했다.


일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건 맞지만 그래도 이번 작품 끝날 때까지는 별 일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니까. 이런저런 상념에 머리가 복잡했고 자고 있는 사람 옆에서 혼자 멀뚱멀뚱 깨어 있기도 뭣해서 집에 가려고 옷을 챙겨 입는데 석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기 관리 똑바로 하랬지.”

“어.. 깼어?”

“이번 작품 끝나고 다른 제작사에서 오라고 하면 어떡할래? 홀랑 가 버리고 싶지?”

“우리 함께 하기로 약속 했잖아. 그럴 일은 없지. 사람을 뭘로 보고.”

“한 번 그래보시든가. 그러게 책임 질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뭘 했다고?”

“주변 관리 못하는 스타일이네. 나한테도 넘어올 정도니 섹시한 여배우가 꼬시면 가관이겠어.”

“너니까 이런 거지. 믿으니까. 내가 널 못 믿으면 누굴 믿냐.”

“과연 그럴까?”


뜨끔했다. 설마 혜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들켜 버린 걸까?


“그건 그렇고 이름은 생각해 봤어?”

“무슨 이름?”

“백 이사가 이름 바꾸랬잖아! 기억 안 나?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으론 곤란하다고!”

“아 그 이름? 아직.. 그런데 정말 바꿔야 되는 거야? 시나리오도 잘 봤다며?”

“시나리오 잘 본 거랑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의 차기작을 함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지.”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꼴리는 영화’가 그렇게 부끄러운 작품은 아니야. 제작사에서 갑자기 지들 멋대로 제목을 바꾸는 바람에..”

“니가 아직 고생을 덜 했구나? 알았어. 이름은 내가 정해줄게.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

“아직 시간 많잖아! 천천히 생각해볼게.”


개명까지 해 가며 차기작을 찍어야 하는 건지 심란해 있는데 석 팀장은 빨리 집에 가라며 등을 떠다 밀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촬영 들어가면 바쁠 테니 그 전까지 최대한 가족들에게 잘 하라는 것이다. 아니 석 팀장이 이렇게 사려깊은 여자였나? 갑자기 호감도가 상승하며 아주 잠깐이나마 유정이랑 이혼하고 석 팀장과의 미래를 그려보았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왜? 굳이?



***



증거 인멸을 위해 집 앞 편의점에 들러 소주 한 병을 사서 몸 이곳 저곳에 흩뿌린 후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도 전에 복도 어디선가 서글픈 통곡 소리가 들려왔고 어쩐지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역시나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쿵쾅대는 심장 박동 소리를 느끼며 집에 들어갔더니 통곡 소리는 세미 방 안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파악하려는데 이마에 손을 대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유정은 내가 들어온 걸 알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저래?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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