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유정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세미가 울면서 들어오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는데 대답도 없이 방에 들어가서 대성통곡을 하더란다. 뭔 일 났구나 걱정이 돼서 따라들어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한참을 윽박 질렀더니 촬영장에서 베드신을 찍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촬영장에 갔는데 창한 없이 혼자 왔다고 하자 감독이랑 피디가 갑자기 대본에도 없던 베드씬을 찍어야 한다며 분위기를 조성했고 싫다고 하니까 예술영화에 나오는 아트이므로 이상한 걱정은 안 해도 되고 만약 안 찍으면 위약금을 내야 할 지도 모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쌍팔년도 영화판에 그런 양아치들이 있었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는데 내 딸이 그런 일을 당했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필이면 창한에게 세미 매니저 일을 그만하라고 통보 하자마자 이런 일이 터졌다는 것도 이상했다. 마치 세미가 창한 없이 혼자 촬영장에 올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처음부터 노린 거 아닐까?
설상가상 유정은 제작비까지 보탰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했다.
“제작비를 보탰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정을 보자 눈 앞이 캄캄해졌다.
“미쳤어? 베드씬도 어이가 없는데 배우한테 제작비를 투자하라고 하면 당연히 사짜 아니야?”
세미가 주연급으로 캐스팅 됐다고 해서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구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제작비를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제작비까지 대주고 베드씬을 찍은 셈이네? 하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지만 도대체 뭘 찍고 온 건 지 모르니 덜컥 겁이 났다.
“뭘 찍었는 지는 알고?”
“자세한 얘긴 못 들었어.”
“허허..”
나도 모르게 자꾸 실소가 나왔다.
“주인공 시켜주고 지분까지 챙겨준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주식 투자하는 셈 치고 딸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지!”
“얼마?”
“세 장.”
“삼백?”
“아니.”
“삼천? 아니 왜 말을 안 했어!”
내가 언성을 높이자 유정도 성질을 했다.
“말했으면 못하게 했을 거 아냐!”
그냥 사기가 아니라 딸을 위하는 부모 마음을 이용한 사기여서 더 짜증이 났다. 진짜 악질에게 제대로 걸렸다. 예전에 감독이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해서 검색해봤을 때 관상은 멀쩡해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 당장 그 놈들에게 달려가서 세미의 베드신 촬영 데이터 원본과 삼천만원을 받아오려 했으나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차분해졌다. 그럴 놈들이면 애초에 억지 베드씬을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막 나가자는 거다. 사태를 해결하려면 나도 막 나가야 하는데 ‘가족사냥’이 걸렸다. 행여나 일이 커져 신문 사회면에 오르는 물의를 빚기라도 하면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데..
“그 새끼들한테 내가 뭐 하는 사람인 지 얘기한 적 있어?”
“그냥 이 쪽일 한다고만 했어.”
답이 나왔다. 분명 애 아빠가 누군지 알고는 폭망 감독이라고 만만하니까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그러게 내가 배우 같은 거 하지 말랬지! 어째 이상하다 했어. 애초에 배우 할 관상이 아니라니까!”
분노를 삭일 길이 없어 혼자 길길이 날뛰며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은근히 뜨끔했다. 내가 ‘꼴리는 영화’ 촬영장에서 수아에게 한 짓이 놈들이 내 딸에게 한 짓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사실상 나도 똑같은 쌍팔년도 영화판 양아치다.
수아에게 한 짓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한창 촬영 도중에 투자사에서 대본에는 없던 여배우의 노출과 베드씬을 요구하는 바람에 힘 없는 감독으로선 영화를 위해 배우를 설득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 필요하고 감독님이 정 원하신다면 벗어주겠다며 흔쾌히 노출 연기를 감행해 준 수아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비록 지금은 다신 안 보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지만.
“애한테는 관심도 없고 맨날 밖으로만 도는 주제에 왜 큰 소리야? 너는 뭘 잘 했다고!”
유정은 갑자기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여기서 왜 내 얘기가 나와? 사고를 쳤으면 어떻게 수습 할지 얘기를 해야지!”
“너도 감독이랍시고 여배우들 등쳐먹고 다니는 건 아니지?”
“나는 그러고 싶어도 못해! 감독이라고 다 같은 감독이 아니라고!”
“그럴 수 있으면 하겠다는 소리야?”
“자꾸 말꼬리 잡지 마!”
찔리는 바가 전혀 없진 않고 이런 식으로는 유정이 쉽게 진정될 조짐이 보이지 않아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다행히 유정도 지금은 나랑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의 확전은 없었다.
***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왔다. 세미가 다시는 촬영장에 가지 않겠다고 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미의 베드신 촬영 데이터 원본과 제작비에 투자한 삼천만원은 일단 차민오와의 캐스팅 미팅이 끝나고 해결해야 했다.
사무실에 갔더니 출근 시간 전이어서 직원들은 아직이었는데 강 대표 방에서 나오는 후배 감독 태준과 딱 마주치고야 말았다. 태준은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목례를 했다. 강 대표는 안에서 통화 중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어 그래 잘 지냈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새끼가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지? 설마 밀리언 필름에서 감독 계약을 제안했나? 밀리언 필름이 내 회사도 아니고 뭘 하든 상관없는데 문득 나 대신 ‘가족사냥’ 감독 자리에 앉히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상도가 있지.
“여긴 어쩐 일로?”
“엊그제 대표님이 모닝 커피나 한 잔 마시고 가라고 하셨거든요. 형도 언제 커피 한 잔 해요. 저는 그럼 다음 일정 때문에..”
태준은 어쩐지 뭔가를 숨기는 듯한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내가 없었다면 강 대표가 통화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사를 하고 나갔을 분위기였다. 안 그래도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까봐 노심초사 중인데 태준을 보니 우려가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강 대표는 안에서 계속 통화 중이었다. 태준이 나가고 석 팀장이 출근하자마자 감독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좀 전에 태준이 왔다간 거 알아?”
“그랬어?”
“왜 온 거야?”
“몰랐어? 강 대표가 예전부터 공 들였잖아. 태준 감독 데뷔작을 정말 재밌게 봤더라고.”
강 대표가 나의 데뷔작 ‘꼴리는 영화’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재밌게 봤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자기 회사 소속 감독 데뷔작도 아직 안 봤으면서 태준이 데뷔작은 재밌게 봤다고?
“태준이도 밀리언에서 감독 계약하는 거야?”
“별 걸 다 신경쓰고 있네. 이름은 정했어?”
“아직 고민 중이야.”
“미팅 때 물어보면 아직 고민 중이라고 할 꺼야?”
“진짜 모르겠다. 그냥 니가 정해줘.”
“내 맘대로 해도 돼? 그럼 군소리 없이 따르는 거다?”
“알았어.”
“미팅 의상은? 이러고 갈 거야?”
“이게 뭐가 어때서?”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캐주얼한 남색 마이로 어느 자리에나 잘 어울리는 무난한 스타일이었다.
“너무 후줄근하잖아. 차라리 잘 됐다. 좀 전에 연희에게 연락이 왔거든. 오늘 미팅 내일로 연기하자고.”
“왜?”
“모르지. 왜? 내일 안 돼?”
“돼.”
“집에 다른 옷은 없어?”
“글쎄.. 정장이라도 입어야 돼? 결혼식장 갈 때 입는 정장 있거든.”
“맨날 입고 다니는 거? 한 10년 넘지 않았냐?”
“그쯤 됐지.”
‘꼴리는 영화’ 언론 시사회 때 입으려고 산 정장이다. 석 팀장은 용케 그 정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시고 내가 골라주는 걸로 입어.”
석 팀장은 미팅 때 입을 옷까지 코디 해 줄 기세였다.
“감독이 영화만 잘 찍으면 되지. 옷까지 잘 입어야 되냐?”
“이제 알았어? 사람들에게 신뢰를 줘야 할 거 아냐!”
“내가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정말 별 짓을 다 한다.”
“아직은 아이돌도 아니지. 연습생이면 모를까.”
한국 최고의 탑스타를 바로 내일 만난다고 생각하니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나 밖에 없는 딸 세미가 당한 일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이런 나에게 놀랐는데 그들이 원하는 건 결국 돈일테니 뭐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난니맨으로부터는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협박도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빌었다. 혹시나 해서 애널맨 블로그도 비공개 상태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차민오의 복사해서 붙여넣기 같은 매너리즘 연기에 대해 조롱한 포스팅은 여전히 비공개 상태였다. 지워버리고 싶진 않았다. 캐스팅이 안 될 수도 있는데 굳이 지울 것 까지야. 만약 캐스팅이 나가리 되면 작정하고 2탄 간다.
***
집은 초상집 처럼 조용했다. 세미는 저녁밥도 방에서 혼자 먹었다고 했다. 이제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 혼자 냅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분명 창한을 매니저 자리에서 하차시킨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유정은 내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창한씨에게 부탁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역시 같이 가줬어야 했어.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창한이 계속 매니저 일을 봐 줬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자 더 짜증이 났다. 마치 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창한씨가 우리보다 그 놈들을 더 잘 알기도 하고 당신보다는 아무래도..”
“아 시끄러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버럭 신경질로 유정을 조용히 시켰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터진 걸까? 가족도 소중하지만 지금은 내일 차민오 미팅에 집중해야 한다. 차민오라는 탑스타가 폭망 감독 따위를 만나준다는 건 나로서는 엄청난 기회였다. 감사하긴 한데 마지막까지 걸리는 건 개명 요구였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까지 버려가며 감독을 해야 하나? 나중에 사람들이 왜 이름을 바꿨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하나? 감사하면서도 싱숭생숭했고 비참하면서도 기대감에 들뜬 채로 행여나 미팅에 도움이 될까 싶어 민오의 최근 활동 영상들을 유튜브에서 검색해보았다. 과연 탑스타 답게 관련 영상이 많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영상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서연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감독님 내일 미팅 화이팅입니다!’
읽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