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이 본인 영화를 부끄러워하면 배우들은 뭐가 되나요

067.

by Zinn


탑스타 차민오를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이 돼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더니 어느 새 저 멀리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슬슬 배가 고파왔다.


10시 반 미팅이라고 했으니 브런치 미팅일 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메뉴가 뭔지 궁금해졌다. 탑스타니까 뭔가 다른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메뉴일 것 같았다. 탑스타가 먹는 브런치는 어떤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5성급 호텔 식당의 브런치 메뉴 등을 검색하고 있는데 문득 세미의 베드씬 사태는 ‘가족사냥’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상업 영화 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진 후 세미의 촬영 데이터 원본을 되찾으려 했다간 상업 영화 감독이 독립 영화 감독에게 갑질하는 모양새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엿 먹으라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 최경진 감독에게 갑질 당했다는 폭로 글이라도 올렸다간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물의가 빚어질 것이다. 하차 가능성은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 지도 모르는 경우의 수가 또 하나 추가돼서 싱숭생숭한 가운데 석 팀장에게 집 앞에 도착했다는 카톡이 왔고 밖으로 나가자 아파트 입구 가까이에 석 팀장의 차가 보였다. 상가 편의점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 오겠다고 하자 됐다고 해서 냉큼 차에 올랐다.


“오늘은 안 그럴 거지?”

“뭘?”

“또 실 없이 헤헤 거릴 거야?”

“걱정 마. 감독다운 진중한 모습으로 배우에게 신뢰를 줄게.”

“그래야지. 믿는다. 그리고 오늘부터 니 이름은 건으로 하자. 채건.”

“건? 성은 채? 성을 바꿨네? 무슨 아이돌 이름도 아니고 좀 구린 것 같은데?”

“최진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그럼 대안은?”

“하아.. 알았다.”

“채건이 마음에 안 들어?”

“좀 올드한 것 같기도 하고.. 이름 바꾸란다고 냅다 바꿔오는 게 너무 비굴한 것 같고.. 이름은 그렇다쳐도 성까지 바꾸는 건.. 이렇게까지 해서 영화를 해야 하는 건 지..”

“어차피 할 거고 하고 싶잖아? 이왕 할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리고 채건이 뭐가 올드해? 최 감독 10년 놀더니 감 떨어진 것 같다?”


석 팀장이 나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긴 하지만 많이 높은 건 아니다. 나는 폭망 감독이고 석 팀장은 듣보잡 신생 영화사 기획 팀장일 뿐이다. 지가 뭐 대단한 조직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고 크게 보면 피차 퇴출 직전이다. 누가 누구에게 감이 떨어졌다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천 만원이나 쏴 줬으니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하자.


“음..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어. 폭망 감독 주제에 시키는 대로 해야지.”


채건이라.. 성을 바꾼 것도 외자인 것도 올드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차기작이 먼저다. ‘가족사냥’이 대박나고 다들 감독 채건이 누군지 궁금해할 때 사실은 제가 ‘꼴리는 영화’의 최경진이라고 커밍아웃 하면 되는 것이다.


또 다시 폭망한다면? 그 땐 정말 끝이므로 이런 고민할 필요도 없다. 최경진으로 두 번 연속 망하는 것보다 채건으로 망하는 게 낫고 어쩌면 이름을 바꾸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최경진 감독 시절의 구질구질한 인연들이 꼬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한 물 가기 직전의 탑스타 차민오와의 역사적인 첫 미팅 장소는 용산역 근처에 있는 차민오의 비밀 작업실이었다. 언뜻 보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오래된 건물이라 이 안에 차민오라는 탑스타의 작업실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건물은 차민오 소유이고 배우가 작업실이 왜 필요한 지는 모르겠지만 작업실은 꼭대기 층에 있는데 아직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보안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민오는 자기가 건물을 새로 살 때마다 언론에 기사가 나서 히스테리가 생길 지경이라고 했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나도 건물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일층엔 카페, 2층엔 내 회사 꼭대기엔 내 작업실. 감독은 작업실이 있어야 한다.


건물 내부는 외관처럼 허름하진 않았다. 나름 센스있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1층으로 마중 나온 로드 매니저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꼭대기인 5층으로 올라가자 드넓은 로비가 나타났고 안 쪽으론 회의실 같은 방과 유리벽으로 나뉘어진 조그만 방 두 개가 보였다.


왼쪽 방에는 피아노와 다양한 사이즈의 기타와 드럼이 설치되어 있었고 오른쪽 방에는 이젤과 각종 그리다 만 그림들이 가득했다. 악기를 연주하다가 지겨우면 그림을 그리는 시스템인가? 정말 가지가지하고 있었다.


로드 매니저가 안내해 준 회의실에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캐주얼한 복장의 차민오와 세련된 세미 정장 차림의 연희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10시 반 미팅이라고 해서 브런치 같은 거라도 같이 먹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 위에는 커피와 물 그리고 이름 모를 과자 몇 가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선 아무리 비싼 브런치를 먹어도 소화가 안 될 것이다.


탑스타를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이 돼서 밤을 새다시피 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떨리진 않았다. 탑스타라거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보다는 그냥 나랑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화면에서 봤던 것만큼 덩치가 크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담하고 슬림한 편에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채건입니다.”


방금 전에 석 팀장이 지어준 예명으로 자기 소개를 하자 민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최경진 감독님!”


민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했다. 내 손을 꽉 쥐는 악력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맞짱 뜨면 내가 질 것 같았다. 헬스 같은 걸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민오가 내민 손을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잡고는 고개도 숙여야 하나 잠깐 고민을 했지만 명색이 감독인데 이보다 더 비굴해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또 뭔가 감독답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돼서 힐끔 석 팀장 쪽을 봤는데 석 팀장은 민오를 향해 마냥 공손한 미소를 띄고 있을 뿐이었다. 예명 만들라며? 라는 눈빛으로 석 팀장을 노려봤지만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로지 민오만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오랜만! 우리 1년 만인가?”


석 팀장이 탑스타 차민오와 누나 동생 사이였구나! 갑자기 석 팀장이 달리 보였다. 이 바닥은 솔직히 내가 누구를 아느냐가 전부인데 차민오와 누나 동생 사이라면 석 팀장은 마냥 듣보잡 신생 영화사 기획 팀장은 아닌 것이다. 잠깐이나마 석 팀장의 사회적 신분이 나보다 높긴 하지만 많이 높은 건 아니라고 만만하게 봤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불경한 기운을 숨기길 잘 했다.


“뭐야! 1년 만이라니! 기억 못 하는 거야? 얼마 전에도 연희랑 놀러와서 인사 했잖아!”

“하아.. 나이가 들었나? 요즘 깜빡깜빡하네.. 헤헤.”


민오는 석 팀장과의 인사를 마치고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준이 학교 선배시죠?”

“네. 학교 같이 다녔죠.”

“태준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꼴리는 영화’도 잘 봤습니다.”

“아.. 부끄럽네요.”

“부끄럽다니요. 자신을 너무 낮추지 마세요. 감독님이 본인 영화를 부끄러워하시면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뭐가 되나요? 저는 ‘꼴리는 영화’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뵙고 싶었던 거고요.”


혼란스러웠다.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의 차기작에 함께 할 수 없으니 이름을 바꾸라 그래놓고선 영화를 잘 봤다니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 지 감이 오질 않았다. 태준이도 마찬가지다. 둘이 함께 영화를 찍은 건 사실이나 탑스타 차민오의 작품 치고 흥행이 잘 된 편은 아니고 촬영 때까지만 해도 죽고 못 살던 두 사람은 흥행 성적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걸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민오가 감독 준비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태준이 때문이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너도 하는 감독 내가 왜 못하겠냐는 막말까지 퍼부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내가 민오의 맞은 편 자리에 앉자마자 민오는 다짜고짜 시나리오 얘기를 꺼냈다.


“클라이막스에서 주인공 손이 뒤로 묶여 있었는데 앞으로 돌리잖아요? 그게 가능한 건가요?”


석 팀장의 예상 질문지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보니 허둥지둥 어버버 아 그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숙연해지는 게 느껴졌다. 민오의 얼굴에서도 초반의 웃음끼가 사라져 있었다. 식은 땀이 났다. 어떻게든 다운된 분위기를 다시 업 시켜야 할 것 같아 농반진반 “직접 보여드릴까요?” 던졌더니 “네 보여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전혀 농담이 아닌 얼굴이었다.


민오는 진지한 얼굴로 로드 매니저에게 눈짓을 했고 매니저는 어딘가로 뛰어가더니 곧장 밧줄을 갖고 왔다. 나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열중 쉬엇 자세로 돌렸고 매니저는 천천히 다가와 두 손을 밧줄로 꽁꽁 묶었다.


“이게 클라이막스의 주인공 상태고요. 이걸 어떻게 앞으로 돌리냐면..”


나는 토끼처럼 깡총 깡총 뛰며 열중 쉬엇 상태로 결박된 팔을 앞으로 돌리려고 했는데 이게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있는 힘껏 제자리에서 점프를 몇 번 반복했더니 서서히 이마에 땀이 맺혔고 지금 이 순간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촉이 왔다. 이 정도의 험한 꼴은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대충 헤헤 안 되네요 하고 점프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고 분위기도 숙연해서 점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시도해도 뒤로 묶인 팔은 앞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문득 나에게 이런 걸 시킨 것 자체가 일종의 기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싸움이라면 감독 최경진의 완벽한 패배였다.


과연 신인감독 킬러 차민오였다. 감독을 아주 쥐 잡듯 잡는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슈퍼 갑의 냄새가 났다. 첫 만남에 이 정도니 작정하고 갈구면 장난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차기작만 만들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참을 수 있다. 아직까진 괜찮다. ‘꼴리는 영화’ 최경진 감독으로 은퇴할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점프를 해도 뒤로 묶인 양 팔을 앞으로 넘길 순 없었다. 분명 어릴 때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내 능력 또는 신체 구조상으론 무리였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으나 멈추라는 말이 없으니 계속 낑낑 대며 열중 쉬엇 자세로 점프를 했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은 목덜미까지 축축하게 적셔왔다.


어쩐지 탑스타 차민오 캐스팅은 물 건너 간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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