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탑스타 차민오 캐스팅은 물 건너 간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석 팀장이 계약금 조로 쏴 준 천 만원을 빠른 시일 내에 갚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미안함과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고 영화판에서도 선밴데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싶은 씁쓸함이 밀려왔다.
걍 때려칠까? 차기작이고 뭐고 포기하고 딴 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행복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고통스럽진 않을 것 같았다. 차기작으로 흥행과 비평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치자. 그러고 나면 내일 모레 오십일텐데 별 게 있을까? 그래서 뭘 어쩌려고?
맛집가고 비싼 외제차 끌고 가끔 해외 여행 다니는 거 말고 뭐 있으려나? 천만 영화 감독이 아닌 이상 빌딩은 택도 없고. 어리고 예쁜 여배우? 됐다. 혜나와 양서연 피디 덕분에 그 쪽으론 미련을 버렸다. 어리고 예쁜 여자들에게 난 중년의 찌질한 폭망 감독일 뿐이다. 필모그래피에 10년 간의 경력 단절이 있으니 감독도 아니지. 그냥 말 섞기도 싫은 동네 아저씨 또는 투명 인간.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험한 꼴을 견디고 있는 걸까?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자 슬슬 다리 힘이 빠지며 점프 높이가 낮아졌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았다고 나중에 석 팀장에게 혼날 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잘 봤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죠.”
민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드 매니저가 내 뒤로 다가와 두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자리에 앉아 밧줄에 쓸려 벌게진 손목을 어루만지고 있는 내 꼴을 보며 민오가 차분하게 한 마디 했다.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쉽진 않은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아 네. 될 것 같긴 한데 제가 늙어서 유연함이 떨어진 것 같아요.”
“야 그거 가져와 봐.”
민오가 손짓을 하자 로드 매니저는 민오에게 밧줄을 갖다 줬다. 민오는 밧줄을 두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시 로드 매니저에게 건넸다.
“니가 해 봐라.”
“네 형님.”
로드가 팔을 뒤로 돌리자 민오는 친히 로드의 양 손을 묶었고 로드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몇 번 제자리 뛰기를 하더니 헙! 하는 기합과 함께 있는 힘껏 점프를 하고는 결박된 두 팔을 앞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모두 박수를 쳤고 로드는 별 거 아니란 듯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감독님이 맞았어요. 되는 거였네요.”
“미리 연습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부끄럽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감독님. 오늘은 제가 조금 공격적이어도 이해해주세요. 저는 솔직한 걸 좋아하거든요. 영화 한 편 만들려면 개봉까지 최소 3년은 걸리는데 우리가 이 긴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지 아닌지 빨리 알아야잖아요. 그 편이 서로에게도 좋을테고요.”
“그럼요.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억지 웃음을 지으려니 배알이 꼴렸고 위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오바이트가 쏠려왔지만 애써 참고 온화하고 겸손한 미소를 유지했다. 민오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살짝 삐딱한 자세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한 걸 좋아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요. 시나리오는 잘 봤어요. 캐릭터도 욕심나고요. 다 알겠어요. 그런데 왜 최경진 감독님이어야 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훌륭한 시나리오를 쓰신 분이라면 분명히 뭔가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말씀이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말씀이죠라고? 자기를 높이는 건가? 아니면 듣는 이를 낮추는 건가?
“아 네..”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그거 하나로 여기까지 왔고요.”
“그러시겠죠.”
“감독님도 감독님이지만 사실 시나리오에도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에요. 특히 캐릭터요. 캐릭터가 너무 좀 그래요. 연기 변신에는 딱이어서 욕심은 난다만 비호감이랄까.”
“네? 욕심은 나는데 비호감이라고요?”
“그 느낌 아시죠? 진짜여야 하고요.”
민오는 느낌적인 느낌 운운하며 진짜 어쩌구 저쩌구 썰을 풀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 것도 같습니다.”
안다고 할 수 밖에 없었고 알면 무슨 말인지 설명해보라고 할까봐 떨고 있는데 고맙게도 백연희 이사가 끼어들어주었다.
“그러니까 민오의 말은 주인공을 호감형으로 만들어 달라는 얘기죠. 진짜 같아야 하고요. 가능하실까요?”
“네. 그러니까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호감형으로 만들어달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이해가 빠르시네. 잘 알면서 왜 알 것도 같다고 하셨어요. 관건은 살인이고요. 꼭 사람을 죽여야만 연쇄 살인마는 아닌 거잖아요?”
관건이 살인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꼭 사람을 죽여야만 연쇄 살인마는 아니라는 건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알 것도 같다는 말조차 못하겠어서 멍하니 있는데 다들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살인을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를 원하는 건가? 게다가 진짜같아야 하고?
석 팀장 너는 이 얘기가 뭔 소린지 이해가 되는 거야? 힐끔 눈치를 보니 석 팀장은 백연희 이사와 차민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았다고 해줘야 할 것 같아 알았다고 하려는데 민오가 김 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최 감독은 모르는 것 같은데?”
최 감독? 그래도 내가 나이가 많고 업계 선밴데 초면부터 하대는 좀 아니지 않나? 어쨌든 다른 건 몰라도 차민오가 그 자리까지 단지 운이 좋아서 올라간 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사람 보는 눈까지는 몰라도 눈치가 빠르고 제대로였다.
백 이사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느낌을 강조하고 반복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만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여야 하고 관객들에게 거부감이 들면 안 된다는 그 느낌! 그 느낌 아시죠? 아우 진짜 둘이서 쌍으로 느낌 타령을 하도 해 대서 한 번만 더 들으면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빨리 화제를 돌리든가 내가 이해했다는 시그널을 줘야 했다.
“거기에 실화 느낌까지 줘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진짜같은?”
“그렇죠! 이제야 좀 알아들으시네. 실화 느낌은 필수입니다.”
“알겠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잘 고쳐볼게요. 감독은 결과물로 보여드려야죠.”
민호는 이제야 안심이라는 표정이었다.
“부탁드릴게요. 저도 빨리 차기작을 찍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없어요. 그런데 최 감독님이 만들어주신 싸이코패스 캐릭터는 욕심이 나. 말씀드린 그 느낌만 추가되면 당장 내일이라도 출연하고 싶어요. 누나. 내가 이런 말 쉽게 안 하는 거 알지?”
“알지.”
“사람들은 맨날 내가 똑같은 연기 한다고 지랄들을 해 대는데 아니 뭐 배역이 있어야 연기 변신도 할 거 아냐! 아 씨바 갑자기 그 새끼 생각이 나네.”
“그 새끼요?”
“아 있어요. 블로그에 헛소리나 싸지르는 찐따같은 새끼. 그 새끼가 내 연기 조롱한 거 읽고 내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잖아. 애널맨인지 뭔지 걸리기만 하면 아주 그냥. 누나 아직 그 새끼 정체 모르지?”
“됐어. 신경 꺼. 방구석 폐인이 지껄이는 헛소리 잖아. 보나마나 감독 지망생이거나 백수일텐데 상대할 가치도 없어.”
“내가 진짜 그 새끼 고소하려다 말았는데 아우 씨 그냥 고소해버릴 걸 그랬어. 어떤 새낀지 면상이라도 구경하게!”
“그러니까 감독님. 이번에는 우리 민오의 진짜를 끌어낼 수 있는 대본으로 부탁드릴게요.”
백 이사가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민오는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그 뒤로도 한참을 씹어댔고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감독 하차는 백프로고 고소까지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뭘 잘못했다고 고소를 하지? 배우가 연기 못한다는 글을 올린 게 범죄는 아니잖아?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쫄렸지만 은근히 뿌듯했다. 탑스타 차민오가 이를 갈 정도면 나름 영향력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감독으론 실패했지만 블로거로는 성공이다. 헛살진 않았네.
민오는 한참을 더 씩씩대더니 감독과 배우는 긴 여행을 함께 해야 하는 사이이므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고 자기 혼자만의 개똥철학 비슷한 걸 몇 번 더 반복하고는 또 다시 리얼함을 강조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진짜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있겠냐고 묻길래 자신 있다고 했지만 민오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고 정확히 점심 시간이어서 밥을 먹자고 할 줄 알았는데 이걸로 끝이었다. 12시에 미팅이 끝났는데 점심을 안 먹는다는 사실이 굴욕적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민오는 멀리 안 나간다며 손을 흔들었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백 이사의 배웅을 받으며 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민오가 민오가 물었다.
“감독님! 혹시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죠?”
민오가 뜬금없이 생년월일과 출생일시 등을 물어봐서 대답해줬더니 백 이사가 옆에서 받아 적었다. 왜 물어보는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마무리는 태준이 얘기였다. 언제 한 번 같이 보자고. 그냥 하는 소리 같아서 나도 그냥 그러시자고 대답했다.
민오의 건물에서 나오니 12시 반이었다. 면전에서는 감독님이 어쩌니 해도 바로 이게 나의 레벨이었다. 점심 시간 시작과 동시에 미팅이 끝났지만 겸상할 가치는 없는 폭망 감독. 차기작 찍고 싶으면 이름을 바꾸랬더니 냉큼 성까지 바꿔온 비굴한 감독.
하루의 시작치곤 혹독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다음 차례는 미팅 태도에 대한 석 팀장의 지적질이었다.
“사주 명리 공부 중이라더니 진짠가보네. 그래도 니가 아주 별로는 아닌가봐. 최경진이라는 감독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사주를 물어본 거 아니겠어?”
오늘은 지적질 대신 위로 모드였다. 내 비참함이 전해졌는지 나를 달려주려 했다. 하지만 이따위 값싼 동정보단 차라리 지적질이 나았다. 더 비참했다. 내가 이딴 덜 떨어진 놈 취급이나 받으려고 영화과 나와서 10년 넘게 조감독 생활하고 그 더러운 꼴을 참아가며 감독을 했단 말인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그냥 참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태준이 얘기는 왜 하는 거냐? 솔직히 말해봐. 밀리언에도 자꾸 오고.. 너네랑 태준이랑 뭐 있는 거야?”
석 팀장이 한숨을 쉬더니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오해하지 말라는 얘기부터 기분이 나빴다. 내 경험상 십중팔구 기분 나쁜 얘기가 이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