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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창한이 ‘가족사냥’은 자기 작품이라고 버티면 지금 동민에게 받은 임 감독이 준비하던 시나리오인 ‘아빠들’을 들이밀면 된다. 이 작품을 표절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아빠들’이 창한의 작품이라면?
에이 아닐 것이다. 창한이 바보는 아니다. 임 감독에게 한 번 당했는데 또 당할 걸 뻔히 알면서 제 손으로 시나리오를 갖다 바치진 않았을 것이다. 창한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임 감독이 공모전에서 발굴해 냈다는 ‘아빠들’의 시나리오 작가가 나타나서 저작권을 주장하면 어떡하지?
감독 준비에만 올인해도 될까 말깐데 자꾸 쓸데 없는 일이 늘어간다. 하지만 이런 리스크들을 제대로 처리해 두지 않으면 기껏 영화를 잘 만들어봤자 감독 리스크로 창고 영화 직행이다. 머리가 복잡해서 집에 가지 않고 밀리언 필름으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 지났으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고 감독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여러 리스크들의 경우의 수를 검토하고 있는데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재웅 피디의 목소리였다.
통화 내용을 가만 들어보니 다음 약속까지 시간이 붕 떠서 잠깐 사무실에 들른듯 한데 회사가 뭣 같아서 못 다니겠고 이번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만 되면 바로 때려 치울 것이고 감독이라고 하나 있는데 무능한 폭망 감독이라 곧 나가리 될 것 같다는 등 막말의 연속이었다.
불쾌하진 않았다. 대통령도 욕을 먹는데 폭망 감독 따위야 욕 좀 먹을 수 있지. 게다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니 못 들은 척 하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행여나 내가 감독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로 민망해질까봐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데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대사가 들려왔다.
영화도 못 만들면서 왜 저렇게 비참하게 사는 지 모르겠고 아무래도 직업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직업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재웅 피디의 목소리로 “직업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대사를 듣는 순간 ‘최경진 감독 직업 바꿔라’는 난니맨의 악플이 떠올랐다. 난니맨이 재웅이었단 말인가?
재웅은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고는 약속 시간이 바뀌었는지 곧장 다시 나가버렸다. 생각해보니 재웅이라면 충분히 나에게 악감정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언제나 양서연 피디에게만 관심을 줬고 챙겨줬기 때문이다. 기껏 모니터를 부탁한 시나리오에 대한 반응도 시원찮았다. 공모전에 냈다니 나름 야심차게 집필했고 기대도 큰 것 같은데 상심이 컸을 것이다.
아마도 재웅은 회사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난니맨이라는 부캐를 만들어서 해소하는 중인 듯 했다. 내가 폭망 감독으로 몰락해서 받은 스트레스를 애널맨이라는 부캐를 만들어서 해소한 것처럼.
분풀이 대상으론 마침 근처에서 얼쩡대던 폭망 감독 최경진이 만만했을 것이고. 재웅이라면 내가 애널맨이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 법 하다. 감독 방에 있는 회사 컴퓨터로 애널맨 블로그에 로그인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재웅은 컴퓨터에 조예가 깊으니 내 컴퓨터의 사용 기록 같은 걸 뒤져봤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재웅이라면 내 차기작의 진행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으니 일이 잘 풀릴 때마다 난니맨으로 태클을 날린 것도 말이 된다.
이유가 뭐가 됐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회사가 잘 풀리는 게 싫었겠지. 한 마디로 사랑받지 못해 삐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심증이고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재웅이 사무실에서 나간 후 슬그머니 재웅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켜 보았다. 비번이 걸려 있었다. 서랍에 다이어리 같은 거라도 있나 찾아봤는데 개인 물품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면지 등의 낙서 뭉치는 있었는데 별 도움은 안 됐다. 괜찮다. 감독 뒷담화를 까는 통화 내용이 가장 확실한 물증이고 그걸 들은 내가 증인이니까.
재웅은 언제나 똥 씹은 표정이었고 석 팀장은 그런 재웅을 회식에도 안 불러줄 정도로 대놓고 찬 밥 취급이었다. 서연과는 달리 재웅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비만에 말투도 어눌하니 그럴 수 밖에. 본의 아니게 나도 재웅을 무시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익명으로 나를 협박한 걸 용서할 수는 없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 창한을 떼어낼 비장의 카드인 ‘아빠들’의 시나리오를 확보했고 난니맨의 정체까지 얼추 알아냈다. 재웅을 잘 달래서 악플을 지우고 차민오라는 벽만 넘으면 바로 차기작 메이드다!
간만에 후련해진 기분으로 집에 갈까 했는데 뜬금없이 집필 의욕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컴퓨터를 켜고 ‘감독인생 2회차’ 집필을 시작했다. 감독이 자신에게 캐스팅 영업을 하러 온 매니지먼트 대표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대표의 이름은 차민오의 매니저 백연희에서 따와 박연희로 정했다. 박 대표는 전생에 감독에게 캐스팅 갑질을 했던 전과가 있는 관계로 감독은 자신이 전생에 당했던 갑질을 19금 갑질로 돌려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여서인지 5000자까지 논스톱으로 술술 잘 써졌다.
이번에도 업로드와 동시에 거의 실시간으로 덧글이 달렸다. 도대체 신입 여자 피디 성연과는 언제 섹스를 하는 거냐며 만약 다음 화에도 안 하면 하차하겠다는 협박이었다. 발정난 개새끼도 아니고 매번 똑같은 내용의 덧글이 짜증나서 뭐라고 한 소리 하려다가 그래도 유료 회차 고객님한테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성연과의 관계는 시간 문제일 뿐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답글을 남겨주었다.
***
차민오 캐스팅을 위한 ‘가족사냥’ 시나리오 회의가 시작됐다. 강 대표는 회의실 근처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석 팀장에게 미팅 분위기를 들었을테고 나가리 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망이다. 만약 강 대표가 차민오 측의 요구 사항인 살인은 하지 않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를 명쾌하게 해결해준다면 작가 크레딧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지만 정작 도움이 되어야 할 때 숨는 걸 보니 작가는 물론이고 대표로서의 그릇도 아닌게 확실했다. 내가 감독 실격이라면 강 대표는 작가 실격은 물론이고 대표 실격이기도 하다.
회의는 석 팀장이 총대를 매고 진행했는데 어제까지의 변호사는 어디가고 오늘부터는 판사 모드였다.
“주인공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런 비호감 캐릭터를 누가 연기하고 싶겠어?”
어이가 없었다. 언제는 한국판 덱스터 같다며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민오 측에서 한 마디 했다고 사람이 이렇게 달라져도 되는 거야? 석 팀장이 이 정도로 강약약강일 줄은 몰랐다. 영화판에서 오래 버티고 있는 비결을 알 것도 같았다.
양서연 피디는 회의 내내 조용히 회의록만 정리하고 있었고 조재웅 피디는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는 평론가 모드였는데 간혹 진지한 얼굴로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도 제안했지만 고맙진 않았다.
도움이 안 돼서가 아니라 저 순박해 보이는 얼굴 뒤에 음흉하기 짝이 없는 난니맨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가증스러워서이다. 다들 시큰둥하고 의욕이 없었다. 열심히 하는 척은 했으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차민오가 말이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대로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 봐도 이렇다 할 대안은 나오지 않았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던졌다.
“솔직한 의견이 듣고 싶어. 다들 살인을 하지 않는 살인마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내 한 마디에 회의실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결국 그럴 듯한 대안 비슷한 것조차 안 나왔고 다음 회의까지 각자 아이디어를 생각해오기로 하고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석 팀장은 회의실에서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는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좋아. 고쳐 올 때마다 좋아졌고.. 딱 한 번만 더 그렇게 해 주면 안 될까? 방법은 모르겠지만.. 차민오 탑스타잖아. 그런 요구 할 자격 있잖아!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고 딱 그거 하나 얘기한 거니까 들어주자고. 최 감독님의 필력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잖아?”
차기작을 만들려면 어떻게든 해 내야 하는 상황인 건 알겠다. 하라면 해야지 어쩌겠냐. 하지만 확실한 건 나 혼자선 못한다는 것이다. 석 팀장과의 면담이 끝나자마자 창환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따 우리 집 근처 카페에서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했다.
***
창한을 만나자마자 세미가 베드씬 촬영을 당했고 설상가상 유정은 나 몰래 제작비까지 투자 했는데 그 돈까지 날리게 생겼다며 하소연을 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창한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죄송해요. 감독님. 제가 계속 따라갔어야 하는건데..”
의외로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눈빛이 범상치 않아 이번에도 뭔가 해 주려나 기대가 됐다. 창한이라면 실버 트리 필름에서 10년 묵은 잔금을 받아다줬던 것처럼 뭔가 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매니저로서 드릴 말씀이 없네요. 너무 죄송합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어떻게든 수습해볼게요.”
“아니야. 내가 그만두라고 했잖아. 다 내 탓이지.”
라고 말은 했지만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차민오의 요구 사항을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던져보았다.
“생각해보니 주인공이 호감형이어야 스타급 캐스팅이 가능할 것 같아. 스타 배우들은 광고도 많이 하는데 비호감 연쇄 살인마 이미지로 굳어지면 장사 그만하겠다는 소리잖아? 광고주들에게 민폐니까. 쉽지 않은 건 알겠지만 혹시 살인을 안 하는 연쇄 살인마로 수정 가능할까?”
“살인을 안 하는 연쇄 살인마요?”
“그렇지. 살인을 안 하는 게 포인트야. 연쇄 살인마 이미지는 가져가야 되고.”
“그렇게 고치라는 말씀이시죠?”
“꼭 고쳐야 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왕 쓴 시나리오라면 완벽한 게 좋잖아. 만약 이 버전으로 세상에 나갔다간 개나 소나 이래라 저래라 끼어들게 뻔하고 그럼 배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거든. 어차피 주인공이 살인을 하는 건 곤란하단 얘기는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반드시 할 거야. 스타급 캐스팅을 성사시키려면 언젠가는 그렇게 고쳐야 되는 거니까 미리 고쳐두면 좋다는 거지.”
차민오를 만났다는 얘기는 절대로 안 했고 작가로서 스타급 캐스팅 버전을 미리 써보는 것도 괜찮은 훈련이 될 거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차민오가 애매모호 두리뭉실하게 해 준 말들을 곧이 곧대로 전달했다. 그런 느낌 있잖아. 뭔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