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점심은 없다

071.

by Zinn


내가 구창한 작가라면 엄두가 안 날 것 같았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살인을 안 하는 연쇄 살인마를 어떻게 쓰라는 거야? 나는 내가 하는 말임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창한은 이번에도 알 것 같다고 해 보겠다고 했다. 불만이나 불경의 기운이라곤 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데뷔가 간절하기 때문이고 같은 작가 입장에서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한편으론 무서웠다. 이 정도로 데뷔가 간절한데 만약 내가 자기 작품을 도둑질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오려나?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한 번만 눈 감아주면 다음 번엔 반드시 작가로 데뷔시켜주겠다고 하면 용서해줄까? 아니면 가족 같은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냐고 되려 언성을 높여버려?


그 어떤 방법을 써도 곱게 시나리오를 넘겨 받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이실직고는 아직이다. 먼저 임 감독이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발굴했다는 ‘아빠들’의 원작자를 찾아야 한다. 동민이 원작자를 알아보겠다고 했으니 일단은 기다려보자. 혹시 몰라 모르는 척 하고 은근슬쩍 떠 보았다.


“그런데 정말 ‘가족사냥’이 ‘악녀사냥’ 이후 처음 쓴 시나리오야?”

“네. 이것저것 시놉 단계까지 정리해둔 아이템들은 많은데 시나리오는 처음이에요. 왜요?”

“아니. 두 번째 시나리오 치고는 완성도가 너무 훌륭해서. 구 작가는 천재 같아.”

“에이.. 별 말씀을요. 전 아직 멀었습니다.”


아무리 천재 작가라도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를 창조할 순 없을 것이다. 잘 만들어오면 땡큐고 못하겠다고 하면 넌 작가도 아니라고 갈궈서 작품을 넘기라고 구워 삶으면 된다.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불현듯 번쩍 하고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차민오가 나에게 원한 게 정말 캐릭터 수정이었을까?


이건 덫이다. 감독이 아니라 시나리오만 욕심이 나니까 감독에게 불가능한 미션을 던져준 것이다. 도저히 못 고치겠다고 알아서 나가 떨어져주면 자기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목적 달성! 설마 석 팀장도 한 통속일까? 나에게 계약금까지 쏴 줬는데? 하지만 만약 그 돈이 밀리언필름 돈이라면? 에이 그래도 섹스까지 했는데 설마..


아뿔싸. 석 팀장도 그들과 한 통속일 가능성이 컸다. 공짜 점심은 없다고 석 팀장이 그 날 밤에 괜히 섹스를 해 준 게 아니었다. 최경진 감독에게 베팅을 했다거나 남자로서의 매력에 넘어왔다기보다는 감독이 목숨과도 같은 작품을 강탈당하고 빡쳐서 어디 게시판 같은데 영화사 날강도라고 폭로 글을 올리거나 언론 같은 곳에 공론화 시키려고 하면 그 날 밤 섹스로 협박하기 위해서였임이 분명하다.


이 모든 건 ‘살인을 하지 않는 호감형 연쇄 살인마’로 캐릭터를 수정해오라는 주연 배우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 했다는 이유로 감독을 하차시키려는 빅픽쳐였던 것이다. 바로 이거였구나.. 난 아직 멀었다. 왜 이런 큰 그림을 곧장 캐치하지 못한 것일까? 이름을 바꾸라고 할 때 눈치 깠어야 하는 건데..


적당히 눈치 채고 알아서 빠져줬어야 하는데 이름 바꾸라니까 성까지 바꿔오고 열심히 하겠다니까 더 짜증나서 막판에 우빈이 안부를 물은 거였다. 차민오가 내 면전에 대고 우빈의 안부를 물은 건 이 프로젝트의 감독은 이미 우빈으로 내정되어 있다고 눈치를 준 것이다. 우빈은 감독 합격! 나는 감독 실격!


시나리오 수정은 핑계일 뿐이다. 그러니까 ‘살인을 하지 않는 호감형 연쇄 살인마’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이다. 아마 내가 하차 당하면 나에게 요구했던 캐릭터 수정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캐릭터를 어떻게 수정해가도 마음에 안 든다며 까다가 결국은 감독 자진 하차 엔딩이겠지. 깽값이나 좀 챙겨주면 다행이려나?


나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판에 뛰어든 것이다. 창한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데 이번 수정 잘 되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라며 애써 외면하고 있던 우리 관계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파국 엔딩이지.


“나 못 믿어? 못 믿으면 다른 감독이랑 찾아 봐!”


화는 안 났지만 괜히 찔려서 버럭 언성을 높였다. 다시는 이런 질문을 꺼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요.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창한이 정중하게 사과하자 양심의 가책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안하다. 내가 요즘 고민이 많아. 회사에선 다른 감독을 미는 눈치고 너도 알다시피 집 안 꼴은 개 판이고.. 젠장..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이번에도 예전에 실버 트리 필름에서 못 받은 잔금을 받아준 것처럼 뭔가 해 주길 기다하며 열심히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창한은 묘한 눈빛으로 묵묵히 들어줬는데 아무리 창한이라도 이번 일을 해결해주진 못할 듯 했다.



***



창한과는 다음 수정고를 기약하고 집으로 오는데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양서연 피디가 서 있는 것이다. 멀리서 보고는 늘씬한 몸매가 낯익다 싶었는데 서연이었다.


“아니.. 양 피디가 여긴 어쩐 일이야? 말도 없이.”

“시나리오 보내드렸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서운해요 감독님.”


어디서 술을 마시고 왔는지 은은하게 술 냄새가 났고 살짝 비틀거리면서 내 팔짱을 끼는 순간 나도 모르게 후끈 달아올라 버렸다.


“술 마셨어?”

“헤헤. 네.. 조금요.”

“시나리오는 미안해. 빨리 읽는다는 걸 깜빡했어. 나 요즘 바빴던 거 알잖아?”

“감독님 바쁜데 보채서 죄송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나 혼자만 열심히 쓰면 뭐 하나 싶고요. 그리고 저 데뷔시켜주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데뷔시켜라! 데뷔시키라고!”


혀가 꼬인 채 나오는 반말이 묘하게 도발적이었다.


“알았어. 데뷔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데뷔하려면 혼자서라도 열심히 써야지. 우리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얘기할까?”


행여나 서연이 내 팔짱을 끼고 있는 광경을 유정이나 세미에게 들킬까봐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이 인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감독님이 제작도 해 주시면 안 돼요?”


서연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제작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제가 그 동안 쭉 생각해봤는데요 감독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를 감독으로 만들어줄 사람은요. 시나리오 따위 아무리 열심히 써봤자 아무도 저를 감독으로 인정 안 해주면무슨 소용이에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저를 감독으로 만들어주세요! 데뷔시켜달라고요!”

“그.. 그건 그렇지. 그래도 내가 제작은..”

“감독니임~ 아니 대표님! 아닌가? 제작자님이라고 하는 게 맞겠죠? 저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해주는 분은 감독님 밖에 없단 말이에요.”

“미안해. 제작자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감독 하나만 하기도 벅찬데..”

“저는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결론은 감독님이 제작자로 딱이라는 거에요. 감독님이 강 대표보다 못할 게 뭐가 있는데요? 뭣도 모르고 집에 돈만 많은 강 대표도 제작하겠다고 저렇게 나대는데 감독님이 왜 안 된다는 거죠?”


나는 집에 돈이 없잖아.. 라고는 못하겠고 이렇게까지 애원을 하는데 차마 못하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집에 돈이 없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영화는 어차피 개인 돈으로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를 받아야 한다. 강 대표 집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모님 돈으로 영화를 만들진 못한다. 그리고 서연 말대로 뭣도 모르는 강 대표도 제작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니는데 나라고 못하리란 법 있나?


“알았어. 생각해 볼게.”

“그럼 저도 빨리 완성고 보내드릴게요!”

“그 때 보내준 게 완성고 아니었어?”

“아니에요. 감독님은 신뢰할 수 있으니까 미완성고지만 미리 보내드린거에요.”

“아 그랬구나. 난 또..”

“난 또 뭐요?”

“아니야.”


아직 미완성이니까 내가 그렇게 찌질하게 묘사되었을 수도 있다. 완성고에선 다를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제작자 제안을 받고 못 이기는 척 생각해보겠다고 했더니 서연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내 품에 꼭 안겨주었다. 동시에 작품 속에서 나를 찌질한 폭망 감독으로 묘사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은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칠흙같이 어두컴컴하던 세상에 한 줄기 햇살이 비추는 듯 했다. 덕분에 감독 자리에서 하차 당할 것 같은 불안 초조감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제작자라.. 흠.. 나쁘지 않을 지도? 선수 시절에는 안 풀렸지만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론 잘 풀린 축구 감독들처럼 나도 감독으론 안 풀렸지만 제작자로는 잘 풀릴 수 있다. 당장 창한에게서 글도 잘 뽑아내고 있는 걸 보면 영 근거없는 예상도 아니다. 안해봐서 그렇지 막상 해 보면 감독보다는 제작자가 더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서연의 말대로 서연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왜냐고? 서연의 작품은 내 지난 영화 인생을 바탕으로 쓴 시나리오니까. 중요한 건 픽션과 논픽션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연이 나를 작품 속 감독처럼 찌질하게 여기고 있다는 건 일이 꼬이다보니 자격 지심에서 나온 피해 망상일 수 있다. 만약 진짜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제작을 맡아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서연의 작품은 그리 나쁘지 않다. 사람 일 모른다고 흥행에 성공하면 어지간한 로또 급은 된다.



***



서연은 매번 그랬듯 괜히 사람 마음만 들쑤셔 놓고 홀라당 집으로 가버렸다. 술까진 아니어도 커피 한 잔 하면 딱 좋았겠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감독으론 안 풀렸지만 제작자로는 잘 풀릴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가슴이 벅차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 벅참은 여기까지였다.


야심한 밤이라 가족들 깰까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세미의 방에서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양아치들에게 사기 당한 걸 위로도 해 주고 더 이상 폭망 감독이 아닌 대박 제작자로 거듭날 지도 모르는 아빠만 믿으라고 기운도 북돋워줄 겸 살금살금 다가가 방 문을 천천히 열어보니 세미가 컴퓨터 앞에서 빤스 같은 핫팬츠와 나시 차림으로 섹시 댄스를 추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 앞이 핑 돌며 나도 모르게 방 문을 박차고 들어가 고함을 질러버렸다.


“너 이 놈의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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