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세미는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씩씩거리며 컴퓨터 전원 코드를 뽑아버렸고 당장 유정을 불러냈다. 유정과 함께 셋이서 식탁에 앉아 세미의 해명을 들었다. 엄마 아빠가 자기 때문에 날려버린 영화 투자금을 벌어주기 위해서 한 짓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꼭 그딴 춤을 췄어야 했냐고 언성을 높이자 세미는 조회수 때문에 그랬다며 억울해 했다.
“조회수가 나와야 돈을 벌 거 아냐!”
나도 모르게 세미의 볼따구에 손이 날아갈 뻔 했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아빠도 여배우 벗기잖아! 나는 왜 안 되는데!”
“그거랑 이거랑 같아?”
“뭐가 다른데! 애들이 맨날 넌 좋겠다고! 배우 하고 싶으면 아빠 영화에서 벗으면 되겠다고 놀린단 말야!”
이러면 내가 또 할 말이 없다. 눈 앞이 컴컴해지며 말문이 막혔다. 그저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내가 말문이 막히자 유정이 나서주었다.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그런데 도대체 누가 자꾸 그런 소리를 하니? 엄마한테 혼 좀 나야겠다.”
“아 됐어! 학교에 연락하기만 해 봐! 아빠 진짜 싫어! 폭망 감독 주제에.. 아빠 같은 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세미는 벌떡 일어나 셔츠 같은 걸 걸치고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쟤가 미쳤나봐 정말. 자기가 이해해. 사춘기잖아.”
사춘기는 잔인하다. 나 대신 유정이 옷을 챙겨 입고 따라나갔고 잠시 후 세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전화가 왔다. 이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나서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창한에게 전화가 왔다. 세미가 자기 집에 와 있으니 걱정말라는 것이다.
막 울면서 들어오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창한은 뭔가 눈치를 챘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세미가 진정되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만 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랑 둘이서만 있어도 되나 걱정이 됐지만 나는 그런 걱정 할 자격도 없다.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 세미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아빠가 폭망 감독이라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폭망 감독이란 자격지심에 딸 앞에 설 수가 없던 것이다. 창한에게 세미를 데려다주고 간다는 카톡이 왔고 세미는 유정의 위로를 받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딸에게 죽어버리란 말까지 들었다. 데뷔하자마자 폭망 후 지난 10년 간 이보다 더 바닥은 없었다. 집 안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도 안 벗는 영화로 대박을 내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 내 영화 인생에 다시는 노출과 베드씬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가족사냥’에 베드씬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집에서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동으로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감독님! 아니 형님!”
“미안한데 당분간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이유는 묻지 마라.”
“저야 너무 좋죠. 작업하면서 형님한테 상의 드리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살인 하지 않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가 잡히질 않아서요.”
“그게 쉬우면 개나 소나 다 했겠지? 그 어려운 걸 해 내야 탑스타가 출연하고 투자가 되는 거야.”
“형님 말씀이 맞네요. 그런데 어디세요? 제가 모시러 갈까요?”
“아니야. 내가 갈게. 번번히 미안하다.”
“우리 사이에 미안이라뇨. 그리고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는 1895입니다. 형님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세요.”
애초에 창한에게 가족 같은 사이를 제안한 의도는 불순했지만 이제는 정말 창한이 가족처럼 느껴졌다. 현관문 비번까지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 최초로 영화를 만들고 상영한 해인 1895로 설정한 걸 보니 구창한 작가의 영화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전해져 더 미안해졌다.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작가 지망생의 목숨과도 같은 작품을 훔치다니 난 정말 쓰레기다. 하지만 가족 같은 사이에서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창한의 아파트는 40평 쯤으로 우리 가족 3명이 살고 있는 25평 짜리 복도형 아파트보다 넓고 럭셔리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남자 주인공이 본가에서 나와 혼자서 살고 있는 집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벽걸이 텔레비전이 걸려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나의 어릴 적 로망이던 자동차 레이싱 게임용 핸들과 체어가 셋팅되어 있었다.
“우와.. 이거 좀 해 봐도 되냐?”
“얼마든지요.”
창한에게 허락을 받고 레이싱 체어에 앉아 게임을 해보았는데 나이 때문인지 어지럽고 멀미가 나서 금방 내려왔다. 역시 모든 건 때가 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꼭 이렇게 장비를 갖춰놓고 마음껏 레이싱 게임을 즐기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돈이 있어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아마 나의 감독 인생도 데뷔 이후 딱 10년째인 올 해를 넘기면 영원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배 고프시죠? 뭐 시켜드릴까요?”
“고맙지. 갑자기 치킨이 땡기네? 맥주는 있지?”
창한은 치킨을 시켜주었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서 함께 먹는데 자꾸 ‘아빠들’ 생각이 났다. 이미 한 번 물어봤지만 모르는 척 하고 ‘악녀사냥’ 이후 새 작품을 써서 시나리오 공모전에 작품을 응모한 적 있냐고 다시 물어봤는데 창한은 귀찮은 내색 없이 임 감독에게 ‘악녀사냥’을 빼앗긴 이후 새 시나리오는 ‘가족사냥’이 처음이고 당연히 공모전에 응모한 적도 없다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재회했을 때부터 임 감독과는 연락한 적이나 만난 적이 없다고 했으므로 새 시나리오를 써서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한 적이 있어도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거짓말을 한 게 되어버리니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아빠들’의 작가는 동민이 알아봐주는 수 밖에 없다.
치맥을 먹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살인을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가 잘 안 풀린다고 의기 소침해 있는 창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싶었다. 치맥에 대한 보답도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차기작 캐스팅 때문에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스타급 배우와 접촉 중인데 이번 수정만 잘 마무리 해 오면 ‘가족사냥’을 그 배우의 차차기작으로 추천해 줄 수도 있다고 선심 쓰듯 던져 주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아니 형님만 믿습니다.”
창한은 한참을 고마워하더니 그 배우가 누군지 궁금해했으나 아직은 외부 유출 금지라 알려줄 단계는 아니라고 뜸을 들였다.
“그러니까 한 번 열심히 써 봐. 내가 지난 번에 얘기 했던 살인을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 있잖아? 사실은 그 배우가 믿고 신뢰하는 최측근의 피드백이었어. 물론 시나리오를 구 작가 허락도 없이 보여준 건 아니고 무슨 이야기인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했는데 솔깃해하더라고. 중요한 건 그 최측근만 좋다고 하면 그 스타급 배우는 어지간하면 출연하거든. 어려운 거 아는데 한 번 해내 봐. 원래 어려운 거야. 쉬웠으면 누구나 하지 않았겠어? 아까도 말 했지만 그 어려운 일을 해 내야 작가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거라고. 어때? 할 수 있지?”
창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뜸을 들이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살인 말고 자살은 어떨까요?”
“자살이라.. 자살을 어떻게 시킨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한 번 써봐. 궁금하다.”
“살인하지 않으면서 살인마가 되려면 남을 자살 시키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음.. 뭐 그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 될 수 있겠지. 말은 되네.”
“될 것 같아요. 어떻게든 남의 목숨을 끊으면 살인인 셈이잖아요?”
감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나 싶었는데 이거라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감이 왔다. 살인 대신 자살이라.. 어떻게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지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기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애써 잘 모르겠다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창한이 ‘아빠를 자살시킨 싸이코패스 살인마’라는 임 감독 딸 은조의 주장이 떠올랐다.
은조 말 대로 이 새끼가 임 감독 자살시킨 거 아냐?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살인 대신 자살을 떠올린 거지? 창한이 진짜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 계산이 안 돼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운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빠보고 집에 오라고 해.”라는 세미의 말을 전하는 유정의 전화인 줄 알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꼴리는 영화’의 주인공 준철 형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야! 최 감독. 너 차민오 만났다며? 다음 주인공은 나니까 나랑 차민오 투탑인 거네?”
“에이.. 아니야.”
“투탑이 아니라고?”
“아니! 차민오 만났다는 소문이 아니라고. 누구한테 들었어?”
“어디선가 들려왔지. 거짓말이면 곤란한데 우리가 고작 그 정도 사이..”
“나중에 통화해. 지금 회의 중.”
방금 먹은 치킨이 얹힐 것 같아 확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중에 왜 차민오 만났으면서 안 만났다고 거짓말 했냐고 따지면 아직 외부로 공개할 시기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된다. 전화를 끊자마자 창한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준철의 전화인 걸 확인하는 순간부터 줄곧 내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자 도대체 누구 전화이길래 저러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또 뭐라고 둘러댈까 하다가 차민오한테 들어간 시나리오가 ‘가족사냥’이라는 사실이 나의 데뷔작 ‘꼴리는 영화’의 주인공 준철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만 숨기면 될 것 같아 가감없이 준철의 뒷담화를 깠다.
옛날부터 아는 배우하는 형인데 내가 좀 잘 풀릴 것 같으니까 캐스팅 시켜달라고 졸라서 귀찮아 죽겠어. 10년째 시달렸는데 이제는 이 형 문자만 봐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야.. 잘 생기지도 않았으면서 연기도 못하는 주제에 주인공 병에 걸려갖고 어쩌구 저쩌구..
준철의 뒷담화를 듣고 있는 창한의 얼굴이 점차 서늘해졌다. 실버 트리 필름에서 잔금을 받아준 것처럼 준철 형도 조용히 시켜주려나?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됐다.
아마 준철은 내가 차민오를 만났다는 걸 알았으니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출연하려고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물론 내 잘못도 있다. ‘꼴리는 영화’ 폭망 후 지난 10여년 간 형은 나 최경진 감독의 페르소나니까 차기작은 물론이고 영원히 함께 하자는 부질없는 약속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