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3.
꼴에 감독랍시고 괜한 허세를 부렸다는 민망함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렇게 한참을 더 준철의 뒷담화를 까다 창한이 안내해 준 현관 옆 손님 방에 들어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만약 준철이 ‘꼴리는 영화’ 감독 새끼가 배은망덕하게 캐스팅을 빌미로 갑질 했다고 인스타 같은 곳에 폭로라도 하면 안 그래도 감독 하차 위기인데 회사에선 얼씨구나 하면서 쫓아낼 것이다. 준철은 혜나처럼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의 온갖 비리와 약점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다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경력자라서 트러블을 만들지 않으려면 계약서를 갖다 주던가 최소한 석 팀장과 미팅이라도 성사시켜야 한다.
다음 날 사무실에 나가서부터 석 팀장에게 준철을 한 번만 만나달라는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노심초사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도 준철에게선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닌데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돼서 집으로 찾아가보았다.
준철의 거실은 스튜디오로 변신해 있었다. 카메라와 조명이 세팅되어 있었고 매니저와 함께 진지한 얼굴로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자 배우 때려치우고 유튜버를 하겠다는 것이다. 왜 이러냐고 포기하지 마시라고 캐스팅은 어떻게든 얘기해보겠다고 하자 나 따위가 무슨 배우를 하냐며 손사레를 쳤다. 하늘이 나를 돕는 걸까? 앓던 이가 저절로 빠졌다.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
준철이라는 앓던 이가 빠졌지만 회사 분위기는 점점 요상하게 돌아갔다. 태준의 방문이 잦아졌고 툭하면 강 대표와 단 둘이서 어딘가로 나갔다 왔다. 심지어 석 팀장조차 그 자리엔 끼지 못했다. 참다못해 석 팀장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날 하차시키고 태준일 감독으로 고용할 계획이면 빨리 말해. 희망 고문하지 말고.”
석 팀장은 한숨을 쉬고는 사실 이번에도 차민오 측에서 내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태준에게 감독 제안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자기는 최 감독을 밀었으나 강 대표와 백 이사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이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확인사살을 당하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순 없다. 최대한 미안하게 만들어서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낼 것이다.
정시 출근이 시작이었다. 석 팀장의 정시 출근 경고에도 맨날 점심 지나 느지막히 출근했는데 그 누구보다 일찍 나오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석 팀장은 나를 조용히 따로 불러서 왜 이러는 지는 알겠는데 이제와서 이럴 필요 없다고 안스러워 했지만 난 마지막까진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정시 출근과 감독 방을 오래 지키고 앉아 있는 게 다 였지만 그거라도 해야했다. 감독으로서의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 일부러 인사도 거만하게 받았다. 생각해보니 감독이 너무 싹싹한 것도 이상했다. 감독으로서 자신이 없어서 그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뢰가 가지 않고 비굴해 보일 것이다.
이제는 난니맨이 누군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협박할 테면 하라지. 어차피 하차다. 이런 앵글에선 창한이 아무리 죽이는 각색고를 써 온다 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발로 나가지는 않겠다. 강제 하차 당하기 전까지 만이라도 최대한 감독이라는 신분을 즐겨주겠다. 자존심 상한다고 뛰쳐 나가봤자 나만 손해지. 이젠 감독으로 불러줄 사람도 없다. 그렇게 마음은 먹었지만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책상을 지키고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라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가운데 혜나에게 전화가 왔다.
“감독님! 혹시 동민 오빠한테 우리 사이 얘기했어요?”
“아니. 왜?”
“갑자기 연락이 안 와서요.”
“안 했는데? 얘기했으면 뭐 어때? 어차피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니라며?”
“그래도 남의 사생활을 막 떠벌리시면 안 되죠. 겁이 없으시네. 누군 입이 없는 줄 알아요?”
“안 했다니까.”
“감독님 아직도 나 믿어요?”
분위기가 흉흉해지려고 했다. 캐스팅 때문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입금이 되기 전까지 우리 사이는 계속 흉흉해 질 것이다. 하지만 혜나를 주조연급으로 밀지 못할 건 뭐람?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하차 당할 텐데 까짓거 기회를 줘 버리자.
“믿으니까 이번 작품도 같이 하려는 거지.”
“그 말을 믿으라고요?”
“입은 있고 귀는 없어?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아.. 정말요?”
혜나는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 봐. 피디한테 얘기해뒀으니까 곧 연락이 올 거야.”
“감사합니다 감독님.. 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혜나의 급 공손해진 목소리에 다운됐던 자존감이 회복되었고 뭐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석 팀장을 불러 혜나 얘기를 던져보았다.
“배역 중에 주인공 후배있잖아? 혜나는 어떨까?”
“혜나? ‘꼴리는 영화’에 나왔던 그 여배우?”
“응. 나쁘지 않아. 보기와는 달리 열심히 하는 애야.”
“잤구나?”
“나를 뭘로 보고! 아 됐어. 아님 마는 거지 왜 사람을 그렇게 몰고 가?”
“너 설마.. 쓰라는 시나리오는 안 쓰고 여배우 지망생들이나 후리고 다니는 건 아니지?”
“아니거든!”
석 팀장의 이마에 혜나는 캐스팅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혜나가 가족도 아니고 내가 지금 생판 남을 챙겨줄 때가 아니다. 이쯤 했음 됐지 뭐. 그런데 혜나에겐 뭐라고 하지? 에라 모르겠다. 난 최선을 다 했다.
***
창한과의 동거는 대만족이었다. 다시 자유로운 총각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잔소리 하는 아내도 골치 아픈 딸도 없다 보니 레퍼런스 연구라는 명목 하에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와 드라마를 원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창한의 새로운 각색고도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은조의 주장대로 창한이 임 감독을 자살시킨 싸이코패스 살인마라는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번 각색고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살인 후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민오 측에서 요구했던 정말 ‘진짜’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진짜’가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을 깜짝 놀래킬 뭔가라면 정해진 운명이 바뀔 지도 모른다.
다만 창한과 함께 며칠 살아본 입장에서는 창한이 싸이코패스라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 어떤 수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쇄 살인범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창한은 아닐 것 같았다. 수상한 구석이 딱 하나 있다면 안방 안쪽에 있는 방이 언제나 잠겨 있다는 사실이다.
집 구조를 봐선 드레스 룸 같은데 도대체 안에 뭐가 들었길래 맨날 잠궈두냐고 물어봤지만 창한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혹시 싸이코패스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전리품처럼 전시해 둔 건 아닌지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으나 창한에게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을 테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창한이 싸이코패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이일 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들었다. 요리를 잘 하고 옷도 잘 입고 잘 생겼고 자기 관리도 잘 해서 몸매도 슬림하고 무엇보다 나한테 너무 잘 해준다. 수상하다. 아무리 데뷔를 시켜줄 지도 모르는 귀인이라 해도 나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고서는 이렇게 잘 해 줄 리가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딱 확실한 건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사실이다. 지킬과 하이드가 따로 없었다. 특히나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꼬장꼬장한 경비 아저씨는 창한만 나타나면 오줌을 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절절 맸고 식당 서빙 아줌마 역시 옆에서 보고 있는 게 무안할 정도로 매섭게 대했다.
하루는 내가 살살 좀 하라고 한 마디 하자 감독님은 사람이 좋으시니까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들은 잘 해 주면 기어 오른다고 했다. 아래 것들에겐 하대를 해야 피차 편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창한과 같이 다니면 편하긴 했지만 언젠가 나한테도 하대하면 어떡하나 은근슬쩍 걱정이 됐다. 창한의 아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문득 옛날에 임 감독이 니가 그러니까 영화도 그 모양이지.. 라고 한심해 했던 기억이 났다. 사람이 좋으니까 배우와 스태프를 닦달하지 못해서 최대한의 결과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한은 그런 면에선 나와는 정반대였다. 아마 감독을 시켜주면 나보다 훨씬 잘 할 것이다. 회사 측에는 더 더욱 창한의 존재를 숨겨야했다.
***
창한의 각색고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밀리언 필름에서 마음 둘 곳은 양서연 피디의 감독 데뷔 프로젝트 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서연과 새출발하면 어떨까? 비록 나는 40대고 서연은 20대지만 남자는 능력이잖아? 감독은 못 하더라도 서연을 감독으로 데뷔시켜주고 대박나서 부자로 거듭나면 우리의 결혼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감독 방에서 눈치 밥을 먹으며 회사 사람들 눈을 피해 틈틈이 서연의 시나리오를 봐 주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준철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태클이 들어왔다. 유튜브 한다고 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바로 그 유튜브에서 나를 팔고 있다는 것이다.
“준철 오빠 채널 봤어? 니 얘기 하는 것 같은데?”
석 팀장의 제보이자 경고였다. 지난 번 혜나 캐스팅 때 1차 경고에 이은 2차 경고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경고.
“주변 관리 잘 못하지? 계속 이런 식이면 나도 최 감독 쉴드 치는 데 한계가 있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해 봐. 니가 차민오라면 저런 똥배우랑 친한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겠니?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내 생각에 지금 문제는 너야. 입장 바꿔 생각해봐. 예명을 쓴다고 한들 언젠가 정체가 밝혀질 거잖아? 기자들이 그 정도를 모르겠어? 그런데 감독의 전작 제목이 ‘꼴리는 영화’야. 민오 기분이 어떻겠어?”
“그렇지! 니 말이 다 맞아.”
“준철한테 연락해서 영상 내리라고 해. 이거 못 내리면 감독이고 뭐고 끝이야. 알지?”
“알았어. 근데 차민오가 봤대?”
“몰라.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빨리 내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과거로 회귀해서 감독인생 2회차를 시작하지 않는 한 시나리오를 기가 막히게 수정해온다 해도 감독 하차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준철은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궁금해 준철의 유튜브에 들어가보니 “나도 모르게 출연한 19금 영화 썰 푼다!”라는 제목의 영상이 떠 있었다.
“내가 ‘꼴리는 영화’에 나온 거 알지? 그거 원래 제목은 ‘꼴리는 영화’ 아니었어. 촬영 다 끝나고 개봉 직전에 제목을 바꾼 거지. 덕분에 난 내가 ‘꼴리는 영화’라는 19금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걸 포스터 보고 나서야 알았네? 감독이 말을 안 해 준 거지!”
앓던 이가 빠진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