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글만 잘 쓰면 다 용서된다

075.

by Zinn


‘살인 하지 않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버전의 수정고를 넘겼으니 창한이 곧 집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라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아 밀린 청소를 해 주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는데 분리수거장에서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임 감독의 딸 은조다.


은조는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며 아빠를 죽인 증거를 찾아야겠으니 내가 들고 나온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살 시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남의 집 쓰레기를 몰래 뒤지는 건 범죄일 지도 모른다고 만류했지만 은조는 내 손에서 쓰레기 봉투를 낚아챘다.


“감독님도 조심하세요. 아빠처럼 자살 당하기 싫으면.”


은조의 주장대로 창한이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라면 은조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안 무서워?”

“뭐가요?”

“네 말대로라면 네가 이러는 거 창한도 알고 있지 않을까?”

“알아요.”

“진짜? 그걸 아는데도 아직 무사한 걸 보면 연쇄 살인마는 아닌 것 같은데?”

“무시하는 거겠죠. 나 따위는 아무 것도 못할 거라 생각하고.”

“혹시 주변에 이런 얘기 나눌 만한 친구가 없으면 전문가에게 상담 한 번 받아보지 않을래? 내가 알아봐 줄게.”

“됐고요.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살은 안 할 거니까 만약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구창한 작가에게 자살당한 줄 아시면 돼요.”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아마 임 감독님도 딸이 연쇄 살인마를 쫓아다니는 걸 바라진 않으실걸?”

“그럼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데 모른 척 해요?”


부끄러웠다. 은조가 이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줄 몰랐다. 나 역시 창한이 연쇄 살인마까진 아니어도 수상한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긴 했지만 작가는 글만 잘 쓰면 되고 나는 차기작만 찍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애써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창한의 작품을 훔쳤다는 사실을 들켰다간 나도 임 감독처럼 자살 당할 수 있다는 게 걱정이긴 하다만.. 아 맞다. 그런 수가 있었구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창한의 작품을 훔쳤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내가 먼저 창한이 살인마라는 증거를 찾아낸다면 ‘가족사냥’을 완벽하게 내 껄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족사냥’의 캐스팅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당연히 창한이 알게 될 것이고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게 뻔하다. 하지만 그 전에 창한이 살인마라는 증거를 들이밀며 입 닥치고 얌전히 있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한다면 창한도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자살당한다면 네가 살인마라는 증거가 자동으로 공개된다고 하면 별 수 없겠지.


한 시라도 빨리 증거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은조가 뺏어간 쓰레기 봉투 안엔 별 게 없다. 만약 증거 같은 게 있다면 창한의 집 안에 있을 것이다. 쓰레기 봉투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집까지 들어오겠다는 은조를 창한이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는 이유로 떠나 보낸 후 집 안을 구석구석 뒤져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수상한 구석은 없었다.


안방 맞은 편의 도어락으로 잠겨 있는 드레스룸 외엔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나올 법한 평범한 부자 집이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집에서 창한의 개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그냥 깔끔한 성격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만약 증거 같은 게 있다면 도어락으로 잠긴 저 드레스룸 안에 있을 것 같은 감이 왔다.


도어락을 열려고 현관 비밀번호 1895를 눌러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5981도 마찬가지. 창한 같은 감독 또는 작가 지망생의 머리 속에서 나올 법한 비밀번호 조합 몇 개를 눌러봤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그러던 중 석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배드 뉴스와 더 배드 뉴스. 뭐부터 들을래?”

“배드 뉴스.”


석 팀장의 말에 의하면 차민오가 시나리오를 읽다가 주인공이 주변인들을 자살 시키는 부분에서 멈췄고 자살도 살인이라며 이 부분을 수정하지 않으면 더 읽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살인이 안 되고 자살도 안 되면 사람이 어떻게 죽냐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석 팀장은 다시 한 번만 고쳐달라고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더 배드 뉴스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


더 이상 석 팀장과는 할 말이 없어서 전화를 끊고 홧김에 석 팀장을 패싱하고 백연희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쩐지 차민오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은 것 같고 백 이사 선에서 차단당한 것 같았다. 백 이사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제가 지금 회의 중이라..”

“석 팀장에게 들었는데요. 살인이 안 된다고 해서 자살로 고쳤는데 그것도 안 되면 사람을 어떻게 죽이죠?”

“그건 감독님이 고민하셔야죠. 감독 겸 작가시잖아요?”

“대안을 주실 수 없을까요? 저 시키는 대로 잘 쓰거든요.”

“대안은 감독님이 떠올리셔야죠. 우리가 작가는 아니잖아요?”


싸우자는 건가? 슬슬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이사님은 덱스터도 안 봤어요? 주인공이 연쇄살인범인데 시즌10까지 나오고 한국에서도 대박 났잖아요!”

“그건 미국 얘기고요. 한국 시청자들은 그런 거 용납 못해요. 캐스팅도 안 될 걸요? 탑스타들이 광고 떨어지게 그런 캐릭터를 하겠어요?”

“누구는 살인마로 나와도 광고 잘 만 하던데요?”

“그건 그들 얘기고요. 우리 민오는 안 돼요.”

“그럼 어쩌라구요? 대안을 달라니까요!”

“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제가 작가는 아니지만 주인공이 누명을 쓰는 건 어떨까요?”

“연쇄살인범 누명을 쓰라고요?”

“네. 정신 착란을 일으켜도 되고요. 살인을 안 했는데 살인을 했다고 착각하는 거죠.”

“그거라면 민오가 오케이 할까요?”

“아니면 이중인격도 있잖아요.”

“너무 뻔하지 않을까요?”

“감독님이 안 뻔하게 잘 써주시면 되죠.”


나는 이러지 마시고 이번 버전에 자신이 있으니 차민오에게 한 번만 끝까지 읽혀봐주면 안 되냐고 부탁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수차례 애걸복걸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차민오가 끝까지 읽어만 준다면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끝까지 읽힐 방법이 없을까? 태준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석 팀장에 이어 백연희 이사까지 패싱하고 태준이를 통해 차민오에게 시나리오를 끝까지 읽어봐달라는 부탁을 넣었다가 까이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초래 되겠지만 한 번 걸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대로라면 어차피 감독 하차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하차하라고는 안 했다. 태준에게는 언제든 부탁할 수 있으므로 먼저 창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연희 이사의 수정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창한이 다시 한 번 기적 같은 필력으로 죽이는 각색고를 써 올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네 감독님!”

“본론만 얘기할게.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배우 측에 보내봤는데 예상했던 피드백이 왔어.”

“정말요? 정말 제 시나리오를 읽었다고요?”

“당연히 읽었지. 누가 보낸 건데.”

“뭐래요?”

“역시 살인이 좀 걸리나봐. 예상했던 바잖아? 우리나라에선 주인공이 살인 하는 건 문제가 있다니까.”

“하아.. 그런데 살인자를 연기한 스타도 있지 않나요?”

“그럼 네가 그 스타한테 직접 시나리오 줘 보시든가.”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주제 넘었습니다.”

“괜찮아. 구 작가 마음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우리 다시 한 번 도전해보자. 나는 살인 대신 자살 아이디어가 정말 좋았지만 자살도 엄연히 살인이잖아? 아이디어가 고갈됐다면 아예 나랑 둘이서 날밤을 까면서 아이디어를 쥐어짜볼까? 우리 영화가 아까워서 그래.”

“문제가 그거 하난가요? 자살?”

“아무래도 주인공이 남을 자살 시키는 건 살인이나 마찬가지니까.”

“도대체 누가 문제라는 거에요?”

“있어. 꼭 우리가 설득시켜야 하는 사람인 거지. 누명이라거나 또 다른 자아가 살인을 한 거라고 착각하는 건 어떻겠냐던데? 이중인격인거지. 다중이거나.”


백연희 이사의 식상하고 올드하고 구리기까지 한 아이디어를 전달하자 창한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감독님 말씀을 정리하자면 주인공이 살인을 하면 안 되고 살인을 했다고 착각해야 한다고요? 진짜 연쇄 살인범은 따로 있고요?”

“그렇지.”

“감독님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


나도 같은 생각이라 잠자코 있자 창한의 언성이 슬슬 높아졌다.


“그거 하나만 고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걸 건드렸다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되는데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요? 이런 영화도 모르는 분들이 영화를 하니까 한국영화가 이 모양 이 꼴이죠!”

“어쩔 수 없잖아. 스타는 광고로 먹고 사는데 연쇄살인범 이미지를 좋아하겠어?”


더럽고 치사해도 데뷔가 먼저라고 설득을 했지만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도대체 누가 그런 요구를 하는 지만 얘기해주시면 안 돼요?”

“있다니까.”

“그러니까 누구요?”

“배우보다는 매니저나 회사 쪽 의견이라고만 말해둘게. 배우는 작품을 우선하지만 회사는 비지니스가 우선이잖아? 광고 끊기면 자기들도 타격이 있는 거고.”


창한은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살인도 자살도 시키지 않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버전’에 도전해보겠다고 했다.


기특하긴 한데 이게 감히 누구 앞이라고 언성을 높이지? 잘해주니까 기어오르네? 장례식장에서 재회 이후 이런 불경스런 모습은 처음이라 발끈할 뻔 했지만 창한이 지금까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글만 잘 써 와라. 살인자면 어떻고 사기꾼이면 어떠랴.


작가는 글만 잘 쓰면 다 용서된다.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14화감독의 시대는 끝났고 영화는 사양 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