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시대는 끝났고 영화는 사양 산업이다

074.

by Zinn


이어지는 내용은 ‘꼴리는 영화’ 감독 최경진에 대한 조롱이었다.


감독이 출연해달라고 들고 온 시나리오에 부족한 점이 많아 자기가 조언을 해 준 덕분에 그 정도라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촬영을 마친 후엔 너무 감사했다며 형은 내 페르소나니까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하자고 약속했고 조만간 촬영 예정인 차기작에 출연 제안이 왔는데 자기는 굳이 출연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래도 옛 정이 있으니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그런데 내가 ‘꼴리는 영화’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해야 돼? 배우를 안 하면 안 했지? 큭큭큭.”


졸지에 배우를 자기도 모르게 19금 폭망 영화에 출연시킨 뻔뻔한 감독인 주제에 다음 작품에 준철을 출연시키지 않으면 약속을 안 지키는 무책임한 놈이 되는 것과 동시에 데뷔 시켜준 은혜까지 모른 척 하는 배은망덕한 놈이 되어 버리게 생겼다. 더욱 가관인 건 막판 영상 편지였다.


“농담이야 경진아. 그 동안 고생 많았지? 괜찮아. 다음 작품 잘 찍으면 되지. 그리고 굳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 덕분에 데뷔했고 차기작도 찍을 수 있는 거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알았어. 내가 진짜 열심히 할게! 차기작 들어가는 거 축하하고 우리 다시 한 번 잘 해 보자! 화이팅!”


내가 자기 덕분에 데뷔할 수 있었다는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당시 투자사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준철 정도 되는 배우가 출연해주면 투자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준철은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인지도는 높았기에 내 영화에 출연할 급은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출연해준 게 사실이다.


또 다른 사실은 내가 다음 작품에 자기를 출연시켜주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자 엿을 먹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감독 자리가 위태로운데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악재가 등장했다.


준철의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한 차민오와의 차기작은 불가능했다. 허접한 똥배우랑 엮인 폭망 감독 영화에 그 어떤 탑스타가 출연하겠는가! 나라도 안 한다. 현기증이 나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설상가상 영상의 조회수는 900대에서 1000대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구독자는 3000명을 갓 돌파한 상태였다. 이 영상은 차민오 눈에 들어가기 전에 목숨 걸고 내려야 한다.


준철의 영상 편지가 끝나자마자 일단은 구독 버튼을 누르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최 감독! 왠일이야?”

“영상 편지 잘 봤어.”

“봤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내 채널이 벌써 그렇게 유명해졌나?”

“알았으니까 영상 내려줘 형.”

“그건 곤란해.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니거든.”

“알았으니까 내려달라고. 내가 부탁할게. 나 방금 전에 구독이랑 알림 버튼도 눌렀다.”

“하하. 알았어. 회사에 얘기는 해 볼게. 촬영 준비는 잘 하고 있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부탁했지만 딴 청을 피우자 갑자기 분노가 솟구쳤다.


“형 땜에 감독 짤리면 책임 질 거야? 책임 지지도 못할 짓을 왜 하는 거야! 나한테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래! 내가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어? 형이 결정한 거잖아! 씨발!”


‘꼴리는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칼 들고 협박하진 않았고 무릎 꿇고 빌다시피 했지만 나도 모르게 쌍욕이 튀어나왔고 준철은 말이 없었다. 이대로 전화를 끊으면 답이 없어서 다시 한 번 정중히 영상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소리 질리서 미안하고 영상은 내려줘. 다른 사람들이 이 영상을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가 창피하냐?”

“어.”

“미안하다. 똥배우라서..”

“에이.. 똥배우까지는 아니고..”


내가 똥배우라고 부르고 다닌 거 어떻게 알았지? 뒷다마 깐 거 누가 고자질 했나?


“니가 날 똥배우라고 부르고 다닌 거 모를 줄 알았지? 겉으로만 착한 척 하는 비겁한 새끼..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꼴에 감독이라고..”

“똥배우 소리 듣기 싫으면 연기나 잘 해. 영상은 지금 당장 내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우려했던 사태 발생이다. 얼른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카톡도 읽씹이었다. 열 뻗쳐서 누워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준철인줄 알고 받아보니 혜나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또 캐스팅 독촉인가.


“감독님 너무 연락이 없으셔서요. 시나리오 새로 나온 거 있으면 저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배역도 생각해보고 연습도 하고 싶은..”

“미안. 지금 회의 중이라 이따 다시 전화 할게.”


길게 끌고 싶지 않아 대충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 듣보잡 배우 주제에 나대지 말라고 확 욕을 해버리고 싶었지만 후환이 두려워 참았다. 가뜩이나 하차 위기인데 준철의 골질에 혜나의 독촉까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일단은 준철의 영상을 내려야 하는데 전화해도 연락은 안 받고 집으로 찾아가봤자 문도 안 열어줄 게 뻔했다.


석 팀장은 준철의 유튜브 채널에서 최경진 감독을 언급한 영상을 내리기 전엔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어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창한에게 준철에 대한 저주를 퍼부어 댔는데 너무 많이 떠들었는지 창한의 집필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창한도 내가 집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여행 짐을 챙기고 있었다. 혼자 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며칠 집 떠나서 집필에 전념하고 오겠다는 것이다. 그런 거면 이 집은 니 집이니 내가 나가겠다고 했지만 마침 집필 환경을 바꿔줘야 할 타이밍이 됐다며 굳이 자기가 집을 나갔다.


준철과 통화가 되질 않으니 영상을 내릴 방법은 없고 집 앞에서 기다린다고 될 일도 아닌 것 같고 하염없이 영상이 내려가길 기도하고 있는데 서연이 시나리오를 거의 다 썼다며 조만간 모니터를 부탁하겠다고 카톡을 보냈다. 마음 같아선 창한의 집에 놀러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꾹 참았다.


서연은 감독으로선 몰라도 기획피디 일을 하는 걸 지켜본 바로는 작가로서의 재능이 아주 없진 않은 것 같았다. 나의 진솔한 경험담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돼서 작품에 반영이 된다면 감독은 따로 구하면 되니까 덕분에 나도 감독은 몰라도 제작자로는 피보팅이 가능할 듯 했다. 게다가 내 이야기가 들어가 있으니 지분도 주장할 수 있다.


영화는 사양 산업이다. 감독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자기 돈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자기 돈으로 만든다 해도 마찬가지다. 투자 못 받아서 자기 돈으로 만든다는 놀림감이나 될 뿐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다르다. 적어도 돈 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제작자의 시대가 올 지는 모르겠지만 감독보단 여러모로 나을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가리지 않고 작가로부터 글을 잘 뽑아내는 제작자 포지션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준철의 유튜브 채널에서 내 영상을 내릴 방법이 없으니 다 내려놓고 감독 하차 통보만 기다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준철에게서 카톡이 왔다.


‘미안하다 최감독. 영상은 내렸고 잘 해봐. 대박 기원할게. 진심이야.’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준철의 채널에 들어가보니 정말로 나를 언급한 영상이 내려가 있었다. 너무 고마워서 얼른 답톡을 보내려다가 더 이상은 준철 정도의 배우와 엮이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씹어버렸다. 준철 형과는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함께해서 피곤했고 다시는 엮이지 말자.


동시에 창한도 수정 작업을 마쳤다며 시나리오를 보내왔다. 만사 제치고 시나리오부터 읽었다. 싸이코패스 살인마가 주변인들을 자살시키는 과정에 설득력이 부족했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세상에 별 일이 다 있는데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주인공이 직접 살인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자살이든 뭐든 주인공이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면 어찌됐든 살인자인 것 같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살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았다. 이 정도도 안 된다고 하면 이 작품은 접고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석 팀장의 생각도 나와 비슷했다.


“나쁘지 않은데? 자살이 살인은 아닌 거니까. 기발한걸?”


시나리오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석 팀장의 답이 왔다.


“그냥 죽이면 되는 걸 굳이 번거롭게 자살을 시킨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살인을 하지 않는데 사람은 죽어야 되니까 자살 시키는 수 밖에 없잖아?”

“그렇지.”

“준철 유튜브 채널에서 내 영상 내려간 건 확인했지?”

“응 잘 했어. 최 감독. 고생 많았고 이거 차민오 쪽에 보낼 거니까 연락 올 때까지 푹 쉬고 있어.”


준철과는 손절했고 살인 하지 않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 미션도 클리어했다. 난니맨은 조용하고 혜나는 뭐 단역 같은 거 캐스팅 시켜주면 감지덕지하겠지.


이제 정말 잘 찍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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