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어디까지나 픽션이니 논픽션과 혼동하지 말자

076.

by Zinn


이번 수정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창한은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다 썼다며 결과물을 보내왔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자기가 살인을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착각이었다는 뻔한 반전과 억지 전개 그리고 이중인격이라는 무리한 설정에 기어이 작품이 망가지고야 만 것이다.


‘살인 하지 않는 호감형 연쇄 살인마 캐릭터’는 애초에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신통방통했던 창한의 필력도 여기까지였다. 밀리언 필름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다들 최초의 살인자 버전이 가장 좋았고 지난 번의 살인 말고 자살 버전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번의 이중인격 버전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들 차민오 측의 갑질에 가까운 무리한 수정 요구에 지쳤는지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쥐어 짜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번의 이중인격 버전에 대해선 기획 회의 시간 내내 그래도 이 정도면 익숙한 맛은 있으니 나쁘진 않다고 결국 차민오만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무책임한 의견만 도돌이표처럼 회의실 안을 맴돌았다.


석 팀장은 더 이상의 회의는 시간낭비라고 판단했는지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장 백연희 이사에게 이중인격 버전의 각색고를 보냈고 나에겐 그동안 수고했다며 피드백 올 때까진 쉬고 있으라고 했다. 여기까진가?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아 감독 방에서 멍 때리고 있는데 서연은 드디어 완성했다며 나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어쩐지 회의 내내 표정이 밝더라.


할 일도 없어서 바로 읽어보았는데 지난 번 버전이 불쾌라면 이번 버전은 발암이었다. 나를 롤모델로 삼았다는 주인공은 더 찌질해져 있었으며 심지어 엔딩은 자살이었다. 주인공을 희화화하고 놀리는 것까지는 불쾌하기만 했지만 엔딩이 자살인 걸 보고나니 분노가 치밀었다.


데뷔하자마자 폭망 후 10년째 빌빌대다 그토록 염원하던 차기작을 찍을 기회가 왔지만 탑스타의 갑질에 가까운 무한 수정 요청에 줏대없이 휘둘리다 결국은 작품이 망가져 캐스팅에 실패하고 짝사랑하던 이십대 여자 피디에게 고백했다가 까이고 심야 극장에서 약 먹고 자살하는 이야기였다.


다 때려치우고 나가 죽으라는 얘기야? 안 그래도 캐스팅 때문에 마음 고생 중이고 행여나 임 감독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까봐 노심초사 중이고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등등 분노와 배신감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특히나 이십대 여자 피디가 중년의 폭망 감독과 사무실 밖에서 만날 때마다 누가 볼까 창피해서 주변을 살피는 부분은 마음의 상처가 됐다. 설마 나랑 밖에서 만날 때 이런 기분이었던 아니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픽션이니 논픽션과 혼동하지 말자..고 다짐은 했지만 자꾸만 화가 나려고 했다.


하지만 기성 감독으로서 가오가 있지 한참 어린 기획PD에게 뭐 이딴 걸 썼냐고 따질 수도 없다 보니 분노는 사그라들고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니..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감독이랍시고 사무실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끄러워졌다.


이 모든 비참하고 더러운 꼴을 해결해 줄 건 스타급 캐스팅 성사 뿐인데 차민오는 시나리오를 읽지도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보낸 이중인격 버전은 읽어봤자 노답이니 어떻게든 ‘살인 대신 자살’ 버전을 읽혀야 한다.


당장 태준에게 카톡으로 ‘살인 대신 자살’ 버전 시나리오를 보낸 후 전화를 걸어 차민오에게 다이렉트로 전달을 부탁했다. 영화과 후배인 태준인 나보다 한참 잘 나가는 감독님이 됐지만 그래도 선배의 부탁이라고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건 백연희 이사와 석 팀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냐고 나를 걱정해 줄 뿐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비장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시나리오 전달을 부탁했고 태준은 못 이기는 척 알았다고 하면서 일단은 보내주신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차민오에게 보낼 지 말 지 결정하겠다고 했다. 어쩐지 태준의 목소리가 미덥지 않았다. 읽어보고 못 보내겠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게 제일 확실할 듯 했다.


“그러지 말고.. 만나게 해 주면 안 될까?”

“네? 그건 좀..”

“왜 안 돼? 너도 내가 창피하냐?”

“누가 형 창피하대요?”

“내가 먼저 물었으니 대답도 네가 먼저 해.”

“에이 형..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그건 아니고요. 저도 만나기 힘들어요. 차민오 스타잖아요. 형도 뻔히 알면서..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석 팀장이랑 백 이사 패싱한 거?”

“아니요. 그거야 뭐 캐스팅만 되면 아무 문제도 아닐 거고요. 차민오 꿈이 감독이라는 건 알고 있으시죠?”

“어. 인터뷰에서 본 것 같아.”

“업계에서 유명해요. 현장에선 감독이나 다름없고 특히 신인 감독 킬러예요.”

“너한테도 그랬냐?”

“음.. 노 코멘트할게요.”

“괜찮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출연만 해주면 뭔들 못하겠냐.”

“감독 자리를 뺏겨도요?”

“그건 좀..”

“이건 형한테만 하는 말인데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사실은 저도 쫓겨날 뻔 했는데 아직은 감독 데뷔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살려는 주더라고요.”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이중인격’ 버전으로는 차민오를 캐스팅할 수 없을 것이다. 매너는 아니지만 까일 때 까이더라도 그나마 내가 자신 있는 ‘살인 대신 자살’버전을 민오에게 읽혀봐야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차민오가 끝까지만 읽는다면 ‘살인 대신 자살’ 버전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정도 안목이 없다면 절대로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테니까.


태준은 차민오에게 시나리오를 보낼 지 말 지는 자기가 직접 읽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고 얼마 뒤 시나리오가 내가 쓴 것 답지 않게 좋았다며 차민오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역시나 차민오가 지난 번에 보낸 ‘살인 대신 자살’ 버전을 읽다 말았다는 연희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태준이 차민오에게 그런 시나리오 읽어봤냐고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실은 당사자만 알겠지만 백연희 이사의 마음은 확실히 알겠다. 차민오를 ‘가족사냥’에 출연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차민오는 아마도 연기 변신을 위해 ‘가족사냥’의 싸이코패스 살인자 역할이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태준에게 연락하길 잘 했다. 역시 일이 되려면 당사자와 직거래를 해야 한다. 중간에서 수고해 준 태준이 너무 고마워서 진짜 오랜만에 나의 부캐 애널맨 블로그에 들어가 태준의 데뷔작을 혹평했던 포스팅과 네이버 영화에 올린 0.5점짜리 관람평을 삭제했다. 태준인 까방권을 획득했다. 향후 2편은 무조건 호평이다.


이제 남은 건 석 팀장의 분노다. 내가 차민오에게 다이렉트로 시나리오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석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스마트폰에 석 팀장의 이름 석 자가 뜬 것만 봐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너 차민오한테 따로 시나리오 보냈니?”


걸렸다. 역시 세상에 비밀은 없는 것이다.


“응.”

“미쳤어?”

“응?”

“미쳤냐고!”


차분한 목소리로 미쳤냐고 물으니 더욱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이해해줘.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냐.”

“실망이야. 우리가 이 정도 사이 밖에 안 된다 이거지?”

“미안해. 어쨌든 캐스팅이 되는 게 중요하잖아?”

“백 이사는 앞으론 최 감독이랑 안 보겠다는데 정말 자신 있어?”

“백 이사야 뭐 어차피 캐스팅 나가리 되면 다시는 안 볼 사이고 나는 ‘이중인격’ 버전보단 ‘살인 대신 자살’ 버전이 자신 있어.”


문득 백 이사는 차민오의 왼팔인지 오른팔이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차민오가 시나리오를 괜찮게 본다 해도 백 이사가 목숨 걸고 반대하면 나가리각 아닌가? 차민오로부턴 아무런 연락이 없고 패싱하려던 석 팀장과 백 이사에게만 피드백이 오는 걸 보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차민오에게 시나리오 보낸 건 누구한테 들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


석 팀장은 시종일관 차분하다가 막판에 발끈하며 전화를 끊었다. 날 샜군. 감독 방 짐 싸서 나가야겠네. 다행히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애초에 짐을 많이 갖다두진 않았다. 차민오가 얄미웠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보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 내 입장은 뭐가 되나.


탑스타면 다야? 한 물 가기 직전인 주제에. 이건 눈치가 없거나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뭐가 됐건 캐스팅은 나가리 된 것 같다. 두고 보자.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 다음 작품은 어떻게 씹어줘야 속이 시원할까 이를 갈고 있는데 다시 석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아까는 사무실이어서 샤우팅에 한계가 있다보니 밖으로 나가서 다시 전화를 건 듯 했다.


“별 일이 다 있네?”


폭풍 샤우팅을 예상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예상 외의 전개가 이어졌다.


“차민오가 시나리오를 잘 봤다네? 긍정적으로 출연 검토하겠다고 전해달래.”


내 귀가 의심스러웠다.


“이거 실화냐? 믿기지가 않네? ‘살인 대신 자살’ 버전 읽은 거 맞지?”

“응.”

“거 봐! 내가 뭐랬어! 자신 있다고 했지?”

“하지만 조건이 있대.”

“그냥 무조건 다 들어준다고 전해 줘.”

“까불지 말고 들어.”

“네넵.”

“이번에 보내준 시나리오를 보니 자기와 결이 맞는 것 같다며 다음 작업부터는 같이 했으면 좋겠대. 공동으로.”

“응. 좋아. 그러자고 해.”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주인공 캐릭터를 ‘살인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로 수정해 달라는 요구는 나를 하차시키려는 갑질이 아니라 일종의 테스트였던 것이다. 설령 말이 안 되는 요구를 하더라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차민오라는 탑스타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감독합격이다.


차민오 측에서 다음 미팅을 잡아서 알려주기로 했고 회사는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돌변했다. 탑스타가 듣보잡 신생 제작사의 감독을 두 번 이상 만난다는 건 캐스팅 확정이란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진짜로 나만 잘 하면 된다. 밀리언 필름의 운명이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지려는데 뜬금없이 난니맨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제목 : 난 니가 누군지 알고 있다


제목은 언제나처럼 “난 니가 누군지 알고 있다”이고 내용도 없었으나 이번엔 첨부 파일이 있었다. 차민오가 매너리즘에 빠져서 연기는 대충이고 그나마 복붙이라고 씹어댔던 내 부캐 애널맨 블로그의 피디엪 파일이었다. 차민오가 읽고 빡쳐서 블로거를 고소하려다 말았다는 바로 그 차민오 연기 혹평 포스팅이다.


역시 SNS는 인생의 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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