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내가 이 블로그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차민오에게 들켰다간 캐스팅은 물거품이다.
허겁지겁 애널맨 블로그에 들어가 비공개 설정해 둔 차민오의 연기 혹평 포스팅을 아예 삭제해버렸다. 난니맨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 포스팅을 비공개로 돌리기 전에 피디엪을 따두었다는 건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지켜봐왔다는 얘기다. 확 소름이 끼치려는데 문자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강제 로키스한 거사과 해!!!!’
영화과 동기 조지선의 문자였다. 3년 전쯤 ‘넌나 를자 살시킬생 각이냐? 나죽는꼴 보 기싫음빨 리사과해.사과하라고!!!!’라는 문자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또 다시 문자를 보낸 걸 보니 아직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만 문자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이번 문자에도 어김없이 붙어 있는 4개의 느낌표에서 살의가 느껴졌고 3년 전까지는 내가 자신의 영화과 졸업 작품 시나리오를 표절했다며 공개 사과를 요구하더니 이제는 강제로 키스한 걸 사과하라니.. 자신의 사과 요구에 응하지 않고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특단의 조치를 취한 듯 했다.
키스를 한 건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쯤인 1학년 1학기 여름방학 직전의 늦은 밤 으슥한 캠퍼스 구석 잔디밭 벤치에서였다. 둘이 사귈까 말까 요즘 말로 썸을 타던 시기에 벌어진 일인데 내가 강제로 키스를 했다고?
감독 복귀를 앞두고 이런 논란이 불거졌다간 그냥 끝이다. 실격이 아니라 사형. 진실은 중요치 않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될 것이다. 감독 계약서에도 이런류의 논란이나 물의를 일으키면 계약 해지는 물론 위약금까지 내야 한다고 적혀 있고 특히나 계약 전이라면 말 그대로 그냥 끝인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눈 앞이 컴컴해졌지만 드디어 편히 쉴 때가 됐다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해방감이랄까? 어쩌면 나는 누가 말려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난 10여년 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끝내 버리면 더 이상 폭망 감독이라는 조롱을 받지도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차라리 잘 됐다. 어차피 극장은 망했고 영화는 끝났다. 내일 모레 오십에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한 편 더 만들어봤자 남은 인생이 크게 달라질 일도 없을 것이다. 별 같잖은 것들에게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며 거지처럼 빌빌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까짓거 안 하면 그만이니 조지선의 협박에 굴복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지선의 문자가 난니맨의 메일과 비슷한 시각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수상했다. 하필이면 차민오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는 이 타이밍에? 지선이 난니맨이었나? 내가 차민오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고 엿 먹으라고 벌인 짓이라면?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심동민이다! 동민은 지선과 연락을 안 한다고 했지만 만약 동민이 지선에게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려주고 있었다면 퍼즐이 맞춰진다. 생각해보니 지선은 학교 사람들 중 그 누구하고도 교류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연락한 게 동민이었다.
동민과 지선은 학교 다닐 때도 나름 사이가 괜찮았다. 지선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건 동민이 유일했고 지선도 그 때문인지 유독 동민에게만 호의적이었다. 둘이서 영화제도 같이 다닐 정도로 친했지만 단편영화 워크샵을 함께 진행하다가 사이가 소원해진 걸로 알고 있다. 지선이 각본/감독, 동민이 피디였는데 동민의 말로는 지가 무슨 안드레이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도 아닌 주제에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 더 이상 맞춰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건 뭐 학생영화에 헬리콥터 부른 격으로 심동민이란 그릇에 조지선을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 동민에게 전화해서 네가 내 근황을 조지선에게 알렸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동민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면 노답이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하다. 지선의 요구대로 공개 사과해서 해결될 일이면 차라리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공개 사과했다간 난 성추행범에 남의 작품을 표절한 도둑이 된다.
조지선 너야말로 날 자살시킬 생각이냐? 다 내려놓고 이 바닥을 떠나면 그만이지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지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어졌다. ‘강제 로키스한 거사과 해!!!!’ 이런 문자를 보내면 내가 연락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노림수에 넘어간 셈이 되어버려 짜증이 났지만.. 내가 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지선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선은 의외로 금방 받았다.
“이게 누구야?”
“잘 지냈어?”
“너 같으면 그런 짓들을 당하고도 잘 지냈을까?”
“그런 짓이라니?”
“그런 짓이 그런 짓이지. 넌 나쁜 놈이니까 잘 지내겠지?”
통화한 지 채 10초도 안 돼서 두통이 밀려왔고 25년 전에 지선과 내가 왜 썸을 타다 말았는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얘랑은 말이 안 통한다. 설상가상 무슨 대화를 해도 결국은 자기는 선량한 피해자고 나는 악랄한 가해자라는 결론으로 몰고 갔다.
“잘 지내긴. 폭망하고 죽지 못해 살고 있구만.”
“꼴 좋다. 남의 작품 도둑질 하고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 했는데. 인과응보라는 게 없는 건 아닌가봐?”
“방금 전에 보낸 문자는 뭐야?”
“뭐긴 뭐야.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지?”
“하아.. 커피 한 잔 어때? 얘기가 길어질 것도 같은데..”
무려 7년 가까이 자기 문자를 씹었으니 만나자는 말에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커피 한 잔 얘기에 당장 튀어나올 기세였다.
약속 시간은 내일 오후 3시. 장소는 각자 집에서 정확히 중간 지점의 지하철역. 예전 그대로였다. 지선은 약속 장소를 정할 때 절대 우리 집 쪽으로는 오지 않았고 자기네 집 앞으로 오라고 했다. 나 역시 양보하긴 싫었고 그러다보니 언제나 중간에서 만나곤 했다.
***
스무살에 처음 만나 이제는 사십대 중반이 된 조지선에 대해선 일말의 가능성도 느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녀 간의 만남이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안 본 사이에 예뻐졌을 수도 있으니 깨끗하게 목욕하고 나름 예의바른 차림으로 나갔다.
마지막 문자를 받은 건 3년 전이지만 오프라인 만남은 거의 25년 만이고 인스타나 카톡 프로필에서 사진을 본 것도 아니다보니 어떤 모습일 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에 만나면 띄어쓰기를 왜 그 따위로 하는 지는 꼭 물어볼 생각이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지하철역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내니 이쪽으로 오겠다는 답이 왔다. 잠시 후 카페 문이 열리고는 등에 허름한 백팩을 맨 작고 초라한 중년 여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뭔가 묘하게 나이에 맞지 않는 차림이라 신기해서 쳐다봤는데 자세히 보니 지선이었다. 지선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연기를 했다.
“우와 최경진.. 죽을 때까지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완전 아저씨 됐네?”
“다 그렇지 뭐. 너도 많이 변했다? 하긴 너나 나나 내일 모레 오십이잖아?”
“나이 얘기 하지마. 토 나올 것 같으니까.”
지선은 스토커나 보낼 법한 문자를 7년 가까이 보내온 사람 치고는 정상으로 보였다. 그런데 얘기를 나눌 수록 상태가 안 좋은 게 느껴졌다. 과대 망상과 피해 망상이 섞였다고나 할까? 잠깐의 침묵도 견디지 못했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 한 마디에 지나치게 크게 웃었으며 리액션이 과했다.
패션도 90년대 후반에 머물러 있었다. 언뜻 보면 요즘 유행하는 90년대생들의 스타일 같지만 디테일이 달랐다. 가만 보니 허름한 차림이 아니고 한 때 유행했던 아이템으로 나름 멋을 낸 코디였다. 지선도 나처럼 오늘의 만남을 위해 나름 신경 써서 입고 나온 것이다.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만나 이제는 시들어버린 내일 모레 오십인 꿈도 희망도 없는 중년 남녀 둘의 만남이라니.. 기분이 급 다운됐다. 거의 25년 전 일이지만 잠시나마 두근두근 썸을 탔고 캠퍼스 구석에서 남들 눈을 피해 뽀뽀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지선은 내 몰골을 위 아래로 스캔하며 말을 이었다.
“길바닥에서 만나면 못알아봤을 것 같아. 우와 진짜 아저씨! 완전 구려.”
“피차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아까 처음 봤을 때 설마 했다. 하긴 스무살에 처음 만나 지금은 사십대 아줌마니까..”
“나이 얘기 하지 말랬지!”
지선은 25년 전에도 예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젊음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몸매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빼짝 말라 있었다. 빈티가 줄줄 흐르는 걸 보아하니 돈도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시집은 갔던가? 궁금하지 않다. 안 물어볼래.
“너무 마른 거 아니니? 뼈 밖에 없는 것 같아!”
“넌 완전 돼지인거 알지?”
지선은 20대 초반의 나이에도 특이하게 젊음의 가치를 잘 알았고 만나주는 걸 고마워하라며 생색을 냈었는데 더 이상 젊지 않으니 멘탈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래서 7년간 나에게 협박 문자를 보냈을 것이다. 흘러가 버린 젊은 날을 보상 받고 싶었을 것이다.
문자로만 접할 때는 무시무시한 싸이코 스토커가 따로 없었는데 막상 보니 궁상맞게 생긴 작고 빼빼 마른 아줌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쩐지 난니맨은 아닌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어릴 적에 친하게 지냈던 생각도 나서 외모 디스를 이어갔다.
“세월이 무상하네. 그 때 그 여대생은 어디가고 이젠 완전 아줌마가 앉아 있다니.. 소주 한 잔 땡기네.”
“넌 개저씨야! 개저씨 주제에 남 말 하고 있네.”
“네 아줌마.”
연이은 아줌마 공격에 지선의 목소리에서 슬슬 독기가 빠졌다. 기운이 없어졌달까?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가 아줌마라는 공격에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대신 내가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이 나타났다. 독기가 빠진 게 아니었다.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데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오싹했다.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지선이 난니맨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고 안 본 세월이 25년 가까이 되므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지선은 내가 아는 지선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심기를 너무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후환이 두려워졌다.
“말이 없네? 7년 간 답장 못한 건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데뷔하자마자 폭망했잖아. 망신도 그런 개 망신이 없더라구. 마치 수천명의 관객들에게 집단 구타 당한 기분이랄까? 자살은 내가 하고 싶었어. 확 죽어버리고 싶더라.”
최대한 앓는 소리를 해서 지선으로 하여금 비록 아줌마지만 폭망 감독보단 낫지 않냐는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면서 노여움을 풀어주려 했는데 지선의 입에선 상상도 못한 단어가 튀어 나왔다.
“난 암이야. 얼마 못 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