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오해하지 말라는 얘기는 역시나 기분 나쁜 얘기로 이어졌다.
“정말 오해하면 안 된다. 사실 민오는 태준일 감독 후보 중 한 명으로 밀고 있어. 지난 번에 안 좋게 헤어졌다는데 의외로 뒤끝은 없는 스타일인가봐.”
“그렇구나. 그런데 뭘 오해하지 말라는 거야?”
“아직 결정된 건 아니라는 거지. 어디까지나 감독 후보 중 한 명이니까.”
이름 바꿔오래서 아예 성까지 바꿔왔건만 이게 무슨 개소리야? 감독 교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이름은 뭐하러 바꾸라고 한 거야?
“날 두 번 죽이려는 거야?”
“아직 결정된 건 아니라니까! 만약 이번 수정 고가 진짜 진짜 별로라면 장담할 순 없지만.”
“너무 하네 진짜! 이런 경우가 어딨어! 이거 내 시나리오야 내가 썼으니까 감독도 내가 할 거라고!”
“니 시나리오라는 거 누가 몰라? 하지만 니가 썼다고 감독도 니가 하란 법은 없는 거야.”
“진심이야?”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고 했지. 난 네 편이라는 사실 잊지 말고. 다음 작품은 꼭 나랑 하자는 약속 벌써 까먹은 건 아니지?”
그래. 석 팀장은 나한테 계약금을 쏴줬지. 내 편일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즉 감독을 전제로 시나리오 작업 중이었는데 감독을 못하게 되고 시나리오만 넘겨야 되면 각본료를 많이 챙겨주기는 하지. 서로 만족할 만한 금액이 합의가 된다면.”
“됐거든! 더럽고 치사하서 진짜. 배우가 차민오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 회사에서 캐스팅을 못하겠으면 내가 해 올게.”
“1억이면 어떨까?”
“1억?”
1억이면 나쁘지 않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석 팀장은 슬슬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냉정해지자 우리. 니 시나리오라는 거 누가 몰라? 그러니까 민오에게 니가 감독이라는 믿음을 주도록 해 봐.”
“이름이랑 성까지 바꿨는데 뭘 더 어떻게 신뢰를 주냐?”
“그걸 알면 내가 감독하지.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에게도 믿음을 주면 좋겠어.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는 모습은 그만보고 싶다. 조언 하나 해도 될까? 최경진 감독님은 너무 저자세에요. 비굴이 컨셉인 건 아니시죠? 감독은 없어 보이면 안 되지. 아까 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잘 고쳐보겠습니다? 결과물로 보여드려야죠? 이런 말은 감독으로서 해선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해. 감독실격이야. 배우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감독을 원하지 아첨이나 늘어놓는 간신배를 원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말할게. 제발 실없이 웃지 마시고요. 싸보인다니까!”
“그럼 까칠하게 싸가지 없이 굴었으면 감독합격이고 네네 거렸다고 감독실격이란 말이야?”
“까칠하게 굴라는 말이 아니잖아. 감독답게 굴라는 거지. 그나저나 감독님! 캐릭터 수정은 가능하시겠어요?”
“살인을 안 하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거기에 더해서 마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짜 같은 느낌을 주는?”
내 입으로 하는 말인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그거. 잘 아네.”
“넌 이해가 돼? 난 잘 안 되는데?”
“이해 못할 게 뭐가 있어? 광고주에게 비호감으로 찍히지 않을 이미지를 주문한 거잖아. 연기 변신은 하고 싶지만 광고는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멋있는 연쇄살인마 이미지만 가져가고 싶은 거지. 이게 어렵나? 음.. 어렵네. 일단 우리도 생각해볼게. 기획 회의 때 얘기해 보자.”
석 팀장은 회사로 복귀했고 나는 좀 걷고 싶다고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전작이 훌륭하면 배우에게 믿음을 주고 나발이고 없는데 전작이 허접한데 믿음을 준다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나가리각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기 전에 쌍욕이라도 박고 나올 걸 그랬나? 걸어도 걸어도 분함이 가시질 않았다.
이 억울한 심정을 누군가에게 격정 토로하고 싶었다. 가끔은 쌍욕도 편하게 할 수 있는 오랜 친구가 땡기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상대는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영화 인생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동민 밖에 없었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니까 군소리 없이 알았다고 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동민에게 주소를 보내자 40분쯤 뒤에 동민이 한 손에 시나리오 뭉치를 들고 카페로 들어왔다.
“설마 시나리오는 아니겠지? 한 두 번 읽어본 것도 아니고 더 모니터 할 것도 없잖아?”
“시나리오는 맞는데 내 시나리오는 아니야.”
“누구 시나리온데?”
“임 감독님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준비하던 작품.”
“에이 씨 그딴 걸 왜 읽으라는 건데?”
“내가 얼마 전에 니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 니가 쓴 거 맞냐고 물어본 적 있지?”
“응.”
기분이 슬슬 쌔해졌다.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기억이 잘 안 나다가 얼마 전에 생각나서 혹시나 하고 꺼내봤거든. 백문이 불여일견이니까 함 읽어봐.”
동민은 잽싸게 꾸깃꾸깃해진 시나리오를 건네주었다. 제목은 ‘아빠들’이었다.
“지금은 시나리오 읽을 기분이 아닌데.. 파일로는 없어?”
“임 감독님 스타일 알잖아. 파일로는 절대로 시나리오 안 돌리시는 거.”
그래도 부르자마자 여기까지 나와준 게 고마워서 예의상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어주자 싶어서 첫 페이지를 펴 들었는데 어째 첫 씬부터 기시감이 들었다. ‘가족사냥’과 비슷했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그림이 비슷했다. 충분히 표절이라는 오해를 살 법 했다. 그리고 뒤로 가면 갈수록 ‘아빠들’은 창한의 ‘가족사냥’과 거의 카피 수준으로 똑같아졌다. 이 정도면 오해가 아니라 누가 봐도 표절이었다.
누가 누구 작품을 표절한 걸까? 창한이 임 감독을? 아니면 임 감독이 창한을? 하지만 창한은 임 감독에게 작품을 보여줬을 리가 없다. 창한이 임 감독이랑 다시 만나서 작업을 했다는 말은 없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만약 ‘아빠들’이 임 감독의 작품이라면 창한이 임 감독의 작품을 훔친 것이고 날 속인 것이다. 괘씸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나에겐 유리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훔친 게 창한의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사냥’이랑 비슷하지 않아?”
“글쎄.. 모르겠다. 비슷한 구석도 있지만 너무까지는 아닌 것 같고. 그냥 다른 작품 같은데?”
“다르긴 뭐가 달라. 정신 똑바로 차려. ’아빠들’을 임 감독님이 썼을 리는 없을테니 이걸 쓴 작가가 엄연히 따로 있을 텐데 나중에 표절 소송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동민의 말대로 임 감독이 ‘아빠들’을 썼을 린 없다. 작가가 따로 있을 것이다. 설마 창한일까? 하지만 ‘악녀 사냥’을 눈 뜨고 강탈 당했으면서 또 다시 임 감독을 찾아가서 작품을 갖다 바쳤을 리가 없다. 창한은 아닐 것이다.
“임 감독님이 준비했던 작품을 내가 왜 몰랐지? 어지간하면 다 아는데..”
“그 때 임 감독님이 술자리에서 막말 했다고 삐져서 안 볼 때였어.”
그렇다. ’유언’의 조감독 제안을 거절하고 임 감독과 쌩까고 지낸 시기가 있었다. 만약 ‘아빠들’이 창한의 작품이고 내가 임 감독과 소원했을 그 시기에 임 감독과 창한이 어떤 식으로든 교류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 밖에 없다.
“이거 쓴 작가 누군지는 알아? 니 말대로 임 감독님이 썼을 리는 없잖아?”
“감독님이 시나리오 공모전 심사에서 발굴한 작가라는 얘기만 들었어.”
“구창한 작가는 아니겠지?”
“그러면 얘기해줬겠지. 내가 구 작가를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새로 발굴한 작가라면 역시나 창한은 아닐 것이다. 아니다. 창한일 수도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창한이 ‘악녀사냥’의 실패 이후 절치부심 끝에 새로 시나리오를 써서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했는데 또 다시 심사위원으로 임 감독을 만난 것이다. 임 감독은 지난 번에는 자기 잘못도 있으니 이번에는 잘 해보자고 구슬렀을 것이고 창한도 임 감독을 믿고 잘 해보려고 했는데 ‘악녀사냥’ 사태가 재발했을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는 안 봐도 비디오다. 임 감독은 분명히 처음에는 잘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유의 갑질과 가스라이팅 본능이 튀어나왔을 것이고 창한은 당하고만 있다가 또 다시 눈 뜨고 시나리오를 뺏길 순 없으니 임 감독을 죽음으로 응징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말이 되는데 자살이 걸린다. 자살을 어떻게 시킨단 말인가?
“작가 연락처는 몰라?”
만약 ‘아빠들’ 작가의 연락처가 창한의 연락처와 같다면 모든 미스터리가 해결된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없지. 감독님이 알려주지도 않았고.”
“알아봐주면 안 될까? 공모전 준비하느라 바쁘겠지만 나에겐 정말 중요한 문제라서 그래.”
“노력은 해 볼게.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고맙다.”
창한이 그 작가가 아니라면 창한에게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지만 언젠가 그 작자로부터 제기될 표절 소송은 막아야 한다. 그나마 작품이 파일로는 없다니 다행이었다. 만약 원작자가 ‘가족사냥’이 내 작품이라며 세상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창한의 입을 막고 이 종이 뭉치를 없애면 완전범죄 성립이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 맞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슬슬 머리가 아파왔다.
“니가 부럽다.”
“왜?”
“공모전 준비만 하니까 속은 편할 거 아냐. 걱정도 없고.”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공모전 따위나 준비하는 망생이라고 놀리냐? 아휴 됐고. 차민오는 만났고? 만나보니까 스타는 뭔가 좀 다르셔?”
“피곤해. 왕관의 무게가 너무 무겁네.”
“부럽다. 난 그런 왕관이라면 깔려 죽어도 행복할 것 같아. 못하겠으면 나한테 넘기든가. 목숨 걸고 할 자신 있다.”
“넌 시나리오 공모전 준비나 열심히 해. 시나리오만 잘 쓰면 니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다 해결 돼. 그리고 이번엔 최종심에라도 들어야지. 또 떨어지면 딴 것도 좀 써 보고.”
“안 그래도 새로 구상 중인 거 있어.”
“무슨 이야긴데?”
“비밀.”
하나도 안 궁금했는데 비밀이라서 다행이었다. ‘아빠들’ 시나리오 뭉치를 가방 속에 집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좀 가져가서 볼게.”
“맘대로. 대신 꼭 돌려줘야 돼.”
간만의 후련함이었다. ’가족사냥’이 창한의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깨가 가벼워졌다. 다음 할 일이 저절로 그려졌다. 차민오의 요구 사항인 “주인공을 살인을 하지 않는 호감형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로 바꿔달라”는 요구 사항을 창한에게 전달한 후 제대로 반영해오지 못하면 갈궈서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