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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섭 Mar 27. 2021

혼자 남은 방

주거 에세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실한 사람이었다. 공부할 때도, 축구나 농구할 때도, 고등학교에서 연극부를 할 때도, 대학에서 춤 동아리를 할 때도 나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나의 ‘부족함’을 극복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실노력파인 내가 자랑스러웠고 성실함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성실함을 인정받기도 했다. 나의 근면성과 묵묵하고 책임감 있을 모습 덕에 1년 반의 공백기를 깨고 취업을 한 것이다. 비록 정규직은 아닌 프리랜서직이었지만 이 시국에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회사에 출퇴근하기 위해 나는 마침내 방을 구했고 그토록 염원하던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직업 특성상 낮밤이 바뀐 패턴으로 살았다. 늘 늦은 밤에 귀가했는데 그럴 때면 본가 생각이 났다. 그토록 원하던 혼자만의 공간이었지만 늘 불 꺼진 방과 그 적막한 공기가 달갑지 않았다. 각자의 소음이 섞이는 그 공기가 그리웠다. 혼자 남은 방은 내게 외로움과 쓸쓸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쓸쓸함은 조금씩 무뎌졌다. “좀 더 살아보면 금방 사라질 거야.” 라던 자취 10년 차 고시생 형의 말처럼 몇 달 지나자 이젠 소음 없는 고요한 공기가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득문득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쓸쓸함 등의 감정이 올라왔고, 때문에 나는 혼자 있는 방에서 아주 크게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는 습관이 생겼다. 


방의 기운이 좋아서인지 좋은 일이 생기기도 했다. 다른 대기업 원하던 직무에 채용형 인턴 기회가 생긴 것이다. 패기롭게 잘 다니던 프리랜서직을 때려치우고 채용형 인턴에 응했다. 그리고 방도 좀 더 비싼 방으로 옮겼다. 어차피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감당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나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단꿈을 꾸었다. 


오만이었을까. 인생은 역시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나는 불합격 소식을 받았다. 다시 무의 상태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오히려 전보다 상황이 안 좋았던 건 비싸진 월세를 감당해야 했다는 것이다. 혼자 남은 방에서 적적함과 편한 마음이 반반 섞인 채 노래를 불러대던 시절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가치관이 흔들렸다.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공고해졌다. 계속되는 취업 실패와 좌절은 나의 가치관을 흔들었고 우울함의 늪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혼자 남은 방에서 나는 오만가지 생각을 되뇌었다. 성실함은 더 이상 이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은 아니라는 생각. 열심히 사는 많은 이들이 다 좋은 결과를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 가까운 지인들, 그저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원인 모를 질환에 걸렸다는 소식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구나’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세상은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항상 다정한 것 같지 않았다. 


불 꺼진 고요한 방 안에서 유튜브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백상 예술대상의 오정세 배우 수상소감을 보게 되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또 그것이 본인이었음을 인정하면서, 본인은 매작품 똑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했고, 그 결과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작품을 선물처럼 만나 자신도 활짝 필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사는 사람들에게 곧 본인처럼 자신만의 동백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 3분 남짓 영상이 내 가슴에 돌을 던졌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는 내게, 그럼에도 계속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를 증명해준 것 같았다. 


꾸준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운이 중요하다 평가되고, 또 별개로 부정이 판치는 시대지만, 비록 아직 직장이 없어 월세에 허덕이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오정세 배우님의 말씀처럼 곧 나만의 동백꽃을 만나리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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