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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한 장의 종이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당신에게 닿기를

by 행복의 진수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이 하얀 종이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 뭉치들은 겉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종이를 뒤집는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언뜻 보면 그저 흰 종이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내가 직접 찍은 다양한 풍광들이 인쇄되어 있다. 독도의 투명하게 빛나는 바다, 일요일 오후 햇살을 머금은 골목, 해외 북페어에서 만난 낯선 이의 미소까지. 사진은 말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더 많은 감정을 품고 있다. 이 종이들은 이미 나의 기억과 마음을 담고, 조용히 한 권의 책으로 탈바꿈할 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가만히 있지만, 사실 이미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존재들. 나는 그 조용한 장면들을 통해 내가 지나온 계절의 빛과 마음의 결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나는 손재주가 없다. 대신 인복은 많다. 그래서 이 종이들을 접어 책의 형태로 완성해 주는 작가님이 따로 있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종이를 접는 일은, 어쩌면 내 마음을 접어 누군가에게 조심스레 펼쳐 보이는 일과도 같다. 사진을 바탕으로 이야기와 디자인을 더해주는 디자이너님도 있다. 이 작은 책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다. 내 카메라에 담긴 세계가 디자이너의 눈을 거쳐 다시 태어나고, 장인의 손끝에서 하나의 형태로 완성된다. 감각이 모이고 마음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공동의 작업. 그렇게 우리는 함께 책을 만든다.


이번이 벌써 열 번째 미니 사진집이다. 처음 타이베이 북페어에 참가했을 때가 떠오른다. ‘내 사진이 해외에서도 통할까?’ 하는 걱정은,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관람객의 손끝에서 녹아내렸다. 그 후로 국내 북페어는 물론, 후쿠오카, 선전까지 여정이 이어졌다. 내 책은 국경을 넘고 언어를 넘어, 누군가의 손에 들려 새로운 시선과 마주한다.


책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한 장의 종이가 한 사람의 삶을 품게 되는 마법 같다. 누군가의 손으로 접히고, 누군가의 시선으로 읽히며,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종이는 말이 없지만, 그 위에 인쇄된 사진은 수많은 이야기를 속삭인다.


부디 누군가 이 책을 펼쳤을 때, 그 반대편에 담긴 나의 마음마저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조용히, 따뜻하게. 그저 한 장의 사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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