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축복은 저주다

두렙돈 세계여행 100일 차 태국 코사무이 저녁 묵상 #92

by 스피커 안작가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 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세기‬ ‭28:11-13, 20-22‬ ‭KRV‬‬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그를 축복하시고 야곱과의 약속이 완성될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에게 했던 복의 근원과 이스라엘 민족을 근원이 된 야곱이다. 그런데 야곱의 기도가 이상하다. 조건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

“만약 ~해주시면... 내가... 할게요!”

분명히 지켜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해여질 것들에 대해서 확실하게 책임져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자신을 평안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되고 자신의 소유에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을 한다.

샤머니즘적 기도의 시초이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은 나약한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대한민국에는 한동안 야곱의 축복이라는 찬양을 축복송으로 불렀다.

“나는 널 위해 기도하며 내 길을 축복할 거야” 서로를 축복하며 서로가 잘 되었으면 하는 내용의 가사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축복이 가득 넘치고 좋은 찬양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분히 인본주의적인 찬양이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세상적인 복을 빌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야곱을 향해신 주님의 축복에 주목해야지 야곱이 하나님께 빌었던 복에 집중을 하면 안 된다.

한국교회와 나는 전자를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후자를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도 오늘도 나는 죽었다고 말했던 믿음의 조상들처럼 나는 죽고 내 속에 완전히 성령으로 채워졌을 때가 우리에게는 복인 것이다. 이미 복을 받은 믿음의 자녀라면 삶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달란트를 주신 것이다. 나를 위한 사명, 나의 부를 채우기 위한 달란트가 아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갈 때 저절로 먹고 마실고 입고 자는 것을 그분이 해결해주시는 것이다.

더해주실 것에 목숨 걸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목숨 거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죽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