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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끄 Aug 21. 2019

감정은 과대평가되어 있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크... 역시 형님 잘생겼군.”
  “뭐야, 카뮈가 진짜 이렇게 생겼어?”



  내가 고전 코너에서 <이방인> 도입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남자 친구가 내 뒤를 스치면서 말했다. 표지에 있는 이 사진을 말하는 건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멀끔한 중년 신사가 두 손가락으로 턱을 괸 채 시선은 신문을 향해있는 그런 사진이 표지 전체를 정직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올드한 느낌의 디자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게 알베르 카뮈 본인이었다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도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외모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이 전혀 없지만, 이 당최 인정머리라곤 찾아보기 힘들고 웃는 법도 없는 남자를, 누구 하나 경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뫼르소와 마주치는 이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웃으며 손 인사를 하고, 호감을 표시하고, 곧 친구가 되기를 청한다. 작가와 작품을 너무 동일시하면 안 된다지만, 감히 카뮈의 삶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게 된다.

 
  하지만 역시 뫼르소가 나를 사로잡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인정머리 없는 “태도“다. 요양원으로 보내어진 어머니의 비보를 듣고 장례식에 참가하면서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본심이 그렇다 한들 웬만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애도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울컥하기 마련이고, 아니면 적어도 보는 눈이 있을 땐 슬픔을 가장하기라도 한다. 그러나 뫼르소는 타인의 기대에 맞출 필요를 도통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을 통한 아름다운 여자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같은 말로 화답해주는 경우가 없다. 이웃들에게 여자를 등쳐먹는 포주라고 악평이 자자한 레몽이 친구가 되기를 청해도 꺼리지 않는다. 그런 레몽이 자신의 정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쓰고자 하는 편지를 흔쾌히 대필해주고, 잔뜩 성이 나서 찾아온 그녀가 레몽에게 흠씬 얻어맞고 있을 때도 경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고하기를 거부한다.


  그가 여성을 혐오하는 끔찍한 악마처럼 보이는가? 이 책에 나오지 않는, 어머니의 생전에 있었던 불화가 그의 무의식에 대단한 수작이라도 부린 것일까? 그는 그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도덕적인 기준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의 나라면 아마 그가 무고하다는 것은 인정할지라도 그를 악마화하는 검사의 의견에 심정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나의 판단은 나의 판단이다. 타인은 여기서 그리 쉽게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미래의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많은 사람과 일치하기를 원하는 이런 나쁜 취향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이 철학자의 말은 나로 하여금 어떻게든 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숨통을 트게 해 주었다. 살아온 세월이 세월인 만큼 전반적인 태도가 대단히 바뀌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방인>과 같은 재미난 작품을 즐겁게 보는데 방해요인이 사라졌다는 것은 엄청난 이득이다. 오히려 뫼르소의 자기 확신은 경이롭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내는 부분, 자신을 어떻게든 회개시키려는 신부의 일방적임에 일갈하는 대목은 굉장한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자각조차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강하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여기서부터는 게임 <갓 오브 워 4>의 스포일러가 있다.)


  한편으로 나는 뫼르소의 그 확신이란 것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더위나 정욕 따위의 실체가 있는 신체적인 감각은 선명하게 느끼지만 슬픔이나 사랑, 경멸 같은 감정의 영역은 거의 느끼지 못한다. 무감정한 것에 대한 확신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감정이 없기 때문에 바위처럼 단단할 수 있는 것일까?


  <갓 오브 워 4>에서 재해석한 북유럽 신화의 발두르는 이와 대조적이면서도 또 어떤 부분은 궤를 같이 한다. 발두르의 어머니가 겨우살이를 제외한 만물에게 아들을 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신화는 유명하다. 단 <갓 오브 워 4>에서는 그로 인해 발두르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부작용을 얻어 고통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어떠한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아름다운 여인을 품어도 아무런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머니를 끊임없이 원망하고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는 뫼르소와는 반대로 어머니를 향한 분노,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라는 감정은 더없이 강렬하게 느끼지만 신체적인 감각은 모조리 거세되어있다. 그리고 늘 갈증과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이며 자신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이방인>의 뫼르소와 <갓 오브 워 4>의 발두르. 둘의 운명은 모두 거세된 어느 한 부분으로 인해 파멸로 끝을 맺는다. 어느 죽음이 더 비참한가? 편견에 찬 손가락질과 억울한 처분에도 감정이 없기에 흔들림 없이 확신과 평정심을 유지하는 뫼르소와 스스로의 결핍과 광기에 미쳐버린 발두르. 어쩌면 감정은 과대평가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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