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연애 의학과 의사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할까 상상해본다. 우리 동네 치과 의사 선생님처럼 나이가 들면 풍치가 올 수 있다는 무서운 말 같은 걸 무심한 말투로 툭 던지지 않을까?
“서로 의사소통 잘 되시구요. 애착관계 튼튼합니다. 뭐 연차가 오래돼서 이런 감정이 약해지면 자연스럽게 갈라설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구요. 지금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아니, 5년을 이렇게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는데, 헤어지기도 하나요?”
“아이고, 영원한 건 없죠. 사람이 늙고 죽는 이치랑 똑같아요. 받아들이는 것이 본인에게 편안합니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닥칠지 모르는 자연재해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만약 연인과 나 사이에 가족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 강한 애착이 형성됐다고 가정한다면, 실연은 가족을 하나 잃게 되는 셈이다. 둘 중 하나가 큰 잘못을 저질렀거나, 상황이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던가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건 차라리 괜찮다. 권태가 서서히 감정을 부식시켜 마치 없었던 것처럼 무심해진다면, 그건 무슨 치료방법이 없는 퇴행성 질병 같지 않은가? 다음 웹툰 <이토록 보통의>가 나를 공포에 질리게 했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 웹툰은 HIV 보균자, 무성애자, 또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특별한 이들도 보통의 사람처럼 사랑과 이별을 한다는 내용의 단편들을 담고 있다. 그중 첫 번째 단편의 선과 J의 사랑은 너무나 애틋하다. 선은 강박적인 버릇이 있다. 그녀는 밀폐된 공간에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엄마, 엄마, 엄마.”하고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선의 엄마는 폭력적인 남편 곁을 떠나려다가 자식이 눈에 밟혀 다시 돌아오고 말았고, 선은 엄마가 떠날까 봐 두려운 마음과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는 자괴감에 얽어져 이런 버릇이 생겨버렸다. J는 그런 선을 수용하고 보듬어 주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절로 코 끝이 시큰해진다. 이 둘의 사랑은 J가 어느 날 충격적인 고백을 선에게 전하면서 엄청난 시련을 맞이한다.
J가 선을 사랑했던 방식처럼 선도 그 위기를 이해와 수용으로 보답한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 보통의 이유로 이별을 맞이한다. 내가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은 그 이유가 고작 "권태"와 "호기심의 결여"라는 것이다. 애틋한 마음이 무색해진 두 사람의 이별은 아무런 갈등이 없이 따뜻한 포옹으로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형태였고, 그건 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강한 결속이퇴색되어 추억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것도, 고작 권태 때문에 저버릴 만큼 안정적인 애착관계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예전에 팟캐스트를 즐겨 듣던 시절, 강신주의 <다상담>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사람은 행복한 상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불가에서 말하듯이 인생은 원래 “고해” 즉 고통의 바다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 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헤어짐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을 순순히 납득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헤어진 연인과 나쁜 감정 없이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나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해서 살고 있는 그들이 훨씬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걸 알면서도 늘 틈만 나면 불안이 비집고 들어오니 나는 또 고민을 이어간다. 어떻게 해야 이별을 피할 수 있을까? 왜 사람은 외도를 할까? 어떻게 순간적인 열정이 안정적인 관계보다 중요하다는 계산이 설까? 어떻게 해야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 답이 알고 싶어서 책을 몇 권 읽었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는 말은 주로 자조하거나 누군가를 조롱하는 말로 쓰이지만, 나에게 독서란 사랑을 탐구하는 꽤 진지하고 유용한 방법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인간의 사랑이란 분리가 주는 근원적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했다. 단 그 사랑에는 존경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존경이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조종하려고 들지 말고 상대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런저런 구실로 연인을 입맛대로 바꾸려고 들게 되는데, 그 근원은 보통 자신의 콤플렉스나 가족관계에서 오는 결핍 같은 것들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흔히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를 통해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사랑은 흔히 남녀 간의 것이라면 떠오르는 불꽃같은 열정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단단한 동지애에 가깝다. 나도 이런 사랑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많은 사랑의 방식이 존재한다.
이 것은 쑨중싱의 <사랑을 권함>에서 인용한, 심리학자 존 앨런 리의 ‘사랑의 색 이론’ 도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삼원색이 섞이면서 무수한 색이 만들어지듯, 사람의 사랑도 세 가지 기본 요소가 혼합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두 사람이 같은 방식을 갖고 있을 때 만족스러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랑의 기술>에서는 이상적인 사랑을 하나의 형태로 단호하게 못 박지만, 이 책에서는 사랑의 모든 양상을 모두 존중한다. 육체적인 사랑이 격렬한 만큼 빨리 식지만 그것이 나쁘다고 사랑이 아니라며 부정할 이유는 못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테스트에 따르면 나에게는 우애적인 사랑이 압도적이고 소유적인 사랑도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 내가 사랑의 지속성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서 설명이 된다. 그게 내가 소유욕을 표출하는 방식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소유욕이 잦은 연락으로, 혹은 상대가 가깝게 지내는 이성을 질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나의 경우에는 헤어짐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혹시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의 원인과 그 형태를 어떻게는 찾아내서 대비하는 방식을 띤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나니 답답함이 조금 가시긴 했지만 나는 안다. 분명 살면서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단서를 맞닥뜨리게 될 때마다, 나는 별 영양가 없는 탐구를 계속할 것이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잘 맞는 운동 방법을 찾아가듯 관계의 방향성을 보완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위험신호는 빨리 감지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소유적인 사랑을 집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보면 관계를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동력원이 될 수도 있다. 만기일이 다가올까 봐 불안에 떠는 부작용이 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