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의 소설은 어딘가 현실과 연결된 끈을 몇 개 끊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몸에 힘을 모조리 빼고 투명한 문장이 이루는 물결을 따라 둥둥 떠다니면 좋을 텐데,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사바세계를 놓지 않으려고 악을 쓰게 된다. 그건 줄을 놓는 동시에 튕겨져 나가 다시 우울감과 무력감의 늪에 빠져들 것 같아서이다.
우울감에 머물러있고 싶은 마음은 이상한 우월감에서 비롯될 때가 있다. 대학생 시절, 빛나는 사람들을 보면 그에 비해 항상 관람석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박수나 쳐야 하는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게을렀던 나는 뭔가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끊임없이 멜랑콜리함을 파고드는 것에서 특별함을 찾았다. 그게 타인과 나를 구분 짓고 나를 정의하는 가장 편리한 선택지였다. 우울감, 우월감. 'ㅓ'자 하나 차이인 것은 뭔가 연관성이 있는 걸까?
상담치료는 내가 애써 포장한 마음의 잔가지를 아주 모질게 쳐버린다. 그래서 통나무 같은 진심만 남기는 것이다. 휑뎅그렁해진 진심을 마주하게 되면 깜짝 놀라 두 손으로 눈을 철썩 가리고 "아이고, 아이고!" 소리치게 된다. 얼마나 흉하고 창피한지. 그렇게 훈련을 꽤 오랫동안 받았더니, 이렇게 예쁜 샛길로 에둘러가는 작품을 마음 놓고 즐기기가 어려워졌다. 보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곁가지를 툭툭 쳐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쇼코의 미소>나 <한지와 영주>의 가지를 쳐내고 나면 이루지 못한 어떤 비루함이 남는다. 예쁘고 상냥하고 완벽해 보이던 쇼코는 특출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소유는 서서히 침몰해가는 영화감독의 꿈 안에서 어떻게든 낭만과 위안을 자아내고자 했지만 결국 무너져 내린다. 쇼코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차선의 무언가가 되었고, 소유는 가장 보편적 안식처인 가족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우리 자신인 그것이다. 하지만최은영의 문장 안에서 이 모든 건 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듯 찬란해 보인다.
이 책은 허영에 찬 우울러인 나에게는 조금 위험하다. 땅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양껏 노력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들었는데, 다시금 못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예쁜 우울감을 배회하고 싶게 만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