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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뻔펀한 홍사장 Apr 30. 2024

오래 한 생각

감정을 소화시키는 중입니다.

그녀는 고 키가 큰 남자를 만났다.
수십 년 전-그것들이 가능했을 때,
그녀는 남편 명의의 생명보험을 들었.

연히 몰래, 수익자는 당연히 그녀.

매미소리 란한 어느 여름날.
기다란 전신 거울 앞, 쩍쩍 달라붙는 샛노란 장판에 앉아 그녀는 평소보다 짙은 색조화장을 했다.
화장품 케이스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빛내던
그녀의 일곱 살 딸내미는 생경한 무지갯빛 붓질을 보며 물었다.
“엄마, 어디 가요?”
“응, 아빠 가게 가지.”
“이따 치킨 갖다 주세요.”
“응, 그래. 알았어.”
소녀는 몰랐다.
그날 저녁은 아빠의 치킨을 못 먹게 될 것이었고,
그 후 오랫동안, 그녀를 한 번도 볼 수 없을 거란 것을.


딸내미는 여덟 살이 되었다.
소녀의 아빠는 철문이 크고 두꺼운,
어느 큰 건물 입구의 경비실에 소녀를 맡기고 오래 자리를 비웠다.
경찰 아저씨들이 많았다.
꽤 오래 기다린 것 같기도 했다.

갖고 온 책 한 권을 다 읽은 게 언젠데 아빠가 오지 않으니 소녀는 불안해졌다.
엄마를 만나고 왔다고 말하는 아빠.
‘나도 엄마 보고 싶은데, 아빠는 왜 나는 빼고 혼자만 보러 갔다 왔을까?’
소녀는 물어볼 말이 산더미였지만 꼴깍 삼켜야만 했더랬다.
아빠의 눈 주위가 벌겋게 보였기 때문이다.

소녀와 남동생은 시골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었다.
할머니와 작은아버지 내외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간혹 삼촌과 고모들에게 듣는 말도 있었다.
“너희들, 미국도 보내준다는데 고아원에 들어갈래?”

어른들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 천지였고

지난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몇 년 뒤, 소녀는 서울로 돌아왔다.
다시 아빠와 살 수 있게 됐다.
알지 못하는 배불뚝이 아줌마가 아빠 곁에 있었다.

아줌마는 얼굴이 꽤 예뻤다.
그렇게 배가 부른 사람은 처음 본 것 같다.
남산만 한 그 배에는 남동생이 들어있다고 했다.


소녀의 아빠는 손재주가 좋았다.
나무로 이것저것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 냈다.
어느 날은 직접 깎고 다듬은 맴매에 ‘사랑의 매’라는 글씨를 써넣었었다.

두 번째 남동생을 만들어 준 아줌마는 매일 술에 젖었다.
밤마다 소녀와 남동생의 방을 벌컥 열어젖히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줌마는 얼굴은 예뻤지만, 말은 예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아줌마가 아빠의 맴매를 집어 들었다.
맴매는 뱀이 되어 소녀의 몸을 휘감기도 하고,
도 입을 수 없는 멍을 만들기도 하고, 머리를 부어오르게 하기도 했다.
참 이상했다.
맴매의 이름은 사랑의 매였는데, 왜 사랑은 빠지고 맴매만 남았을까?
때리는 아줌마를 말리지 않고, 맞고 있는 소녀를 그냥 지켜만 보는 아빠도 이상했다.
소녀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이번에도 꼴깍 삼켰다.
아줌마와 아빠도 서로 두들겨 패기 바빠서,
소녀의 질문을 들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가슴이 커졌다.
아줌마가 입던 브래지어를 차고, 아줌마가 입던 팬티를 입었다.
마법에 걸렸을 때는 아줌마가 준 임부용 패드를 착용했다.
이게 생리대가 맞는 거냐고, 어떻게 사용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꼴깍, 질문은 삼키라고 존재하는 것이었다.

가출인 듯, 독립인 듯.
소녀는 중3 겨울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짐을 싸 회사 기숙사로 들어갔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책도 주고 옷도 주고 고등학교도 보내주고... 심지어 월급도 준다고 했다.

드디어 맞지 않는 옷을 물려 입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남동생을 두고 집을 나서는 그날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누나만 먼저 탈출해서 너무 미안해. 돈 모아서 얼른 부를게.
소녀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울컥함을 이번에도 삼켜버렸다.


시간은 흘렀고 소녀는 자랐다.
직장도 다니고 결혼이란 것도 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일러 빵빵 틀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책도 읽고 자유롭게 옷도 사고 여행도 가고...
여기도 천국인가 싶었다.

엄마도 두어 번 바뀌고, 어른들의 전쟁과 칼 없는 공격, 손 벌림은 계속되었지만,
다행히 소녀의 결혼은-일단 벙커가 되어 주는-‘좋은 것’이었다.

소녀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드라마에는 그런 장면들이 자주 나왔다.
놓고 간 소녀가 그리워서,
하굣길에 학교 담장에 숨어 소녀를 몰래 지켜보는 엄마.
어느 핸가 지나면, 눈물을 꺼이꺼이 쏟으며
“엄마가 미안했어~”하고 두 팔을 벌리며 나타나는.
여지없이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소녀는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한 번쯤은 저렇게 왔었을까?
내가 못 본 건 아니었을까?
우리보고 싶지 않았던 걸?
혹시... 돌아오고 싶은데 못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 꼴깍.

삼킨 게 너무 많아서,
오랫동안 명치에 풀리지 않은 감정의 체기가 쌓여있던,

이제는 다 커버린 소녀는.



생각을
아주 오래도
하였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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