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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쨍아리 Aug 22. 2024

간병과 함께 받은 위로

간병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린 후 연락이 참 많이 왔다. 여기저기서 오는 연락을 받으며 내가 이렇게 인간관계가 좋았나? 싶었다. 다들 위로의 말을 한마디씩 건넨다. 위로의 말이 참 따뜻해서 기분은 좋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냥 어안이 벙벙할 뿐.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에겐 위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픈 할아버지 옆을 지키는 사람일 뿐인데 무슨 위로가 필요하지? 할 일을 하는 것 뿐인데? 다들 할 일 하느라고 고생스러울 텐데 굳이 왜 나에게 위로를? 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위로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예뻐서, 그 말들이 따뜻해서 계속 듣고 싶었다.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건, 간병 이전에도 내가 느꼈던 “당연히 할 일을 한다”의 연장선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희생한 것이 많긴 하다. 멀쩡히 잘 다니던 알바를 다 그만두고 정리했고 (덕분에 수입이 없어졌는데, 가장 타격이 큰 희생이다), 내 개인 시간은커녕 잘 씻을 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로의 말들은 어색하게만 들렸다.     



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그 ‘의무감’이 나에겐 너무 당연한데 다른 이들에게는 그 정도로 당연하지는 않은가 보다. 아마 그래서 주는 위로겠지?     



이번에 K장녀 특유의 ‘의무감’으로 나의 일부를 포기하고 희생한 것은 반은 내 선택이고 반은 선택을 당한 것이다. 사실 좀 수동적으로 선택했다.     



결코 내가 자원하여 먼저 나서서 간병 생활을 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입원이 결정되면서 간병에 대한 역할에 대해 가족 논의가 열렸다. 나는 거기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생각과 의견을 내기 보다는 도리에 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논의부터 결정까지 진행되는 동안 어떤 부가설명이 붙으면서 논의되었는지 말하자면 길다. 결론만 말하면 내가 선정되었다. 당첨!     



사실 이럴 줄 알았다. 어떤 이유인지 뭐가 중요할까. 가족들의 의견으로 결정된 것이고 그 말은 즉, 내가 할 일이라는 것. 그냥 하는 거지 뭐. 나도 나지만, 다른 가족들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이 결론을 말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미안한 구석보다는 당당함이 보이는 게 내 처지가 더욱 당연해지게 만든다.     



할아버지의 병세에 차도가 좀 생겼냐며 내 상태가 어떤지 묻기도 하는 위로의 메시지가 간간히 날아온다. 내 지인들이 의도한 ‘위로’는 내게는 ‘위로’ 그 본연의 역할로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그냥 이런 이슈가 생겨서라도 그들과 따뜻한 말 한마디 더 나눌 수 있고, 전화 한 통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 중 몇은 정말 감사하게도 면회의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 코로나 비상사태는 해제된지 오래지만, 아직 병원에서의 면회는 그렇게 녹록지 않다. 원칙적으로는 정해진 보호자 말고는 안된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원칙’을 핑계 삼아 모두를 거절했다.     



자기 객관화가 안되는 걸까, 위로가 필요없을 만큼 괜찮은게 맞는걸까. 아무렇지 않다고 확신 했던 나는 오히려 괜찮냐고 묻는 말들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 외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 당연함이 정말 확고했다. 위로를 한 두 개쯤 받았을 때는 믿지 않았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여기며, 내 확신과 이 간병생활을 이어갔다. 계속 이어지는 위로의 말이 확신에 의심을 가져왔다.     



그 확신이 무너지니 병상 옆을 지키면서 이게 힘든 건가? 싶은 필터가 내눈에 끼워졌다. 병원 안 그 무엇도 평범해 보이지가 않았다. 일상생활과는 동 떨어진 곳. 하지만 그마저도 사람사는 공간이라 적응을 못할 건 없었다. 어차피 적응해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점점 익숙해지면서 나눈에 끼워진 필터에 다른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병동에 있는 다른 환자들, 그리고 보호자들. 이들도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다들 최소한 나만큼은 포기하고 희생하고 여기에 있을지 모르는 거 아닌가.     



건네 준 사람의 마음이 무엇이었던, 받은 사람에게 말 한마디는 많은 걸 바꿀 수도 있다. 나에게는 내 상황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혹시나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그 마음들을 담아서 나에게 건넨다는게 ‘위로’의 형태를 띄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위로’가 가진 힘을 새롭게 느끼게 되니 한마디 한마디 말 속에 담긴 우리들의 마음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저 예의상 건네는 말인 줄 알았었던 그 말들이 사실은 깊고 깊은 마음을 담은 위로였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내 감사 답장은 처음엔 예의상의 답장이었으나 혹시 모를 그 마음에 답하고 싶은 내 마음을 담으며 점차 길어져갔다.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적으며 내가 받은 만큼은 되도록 나도 위로의 말을 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나와 비슷한 환경에 처했다면 공감도 가능할 테니 좀 자신있게 진심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받은 ‘위로’로 인해 이 힘을 알게된 것처럼 힘듬이나 어려움이 있다고 나에게 소식이 전해지면, 내 마음을 담아 표현하고 싶다. 그대를 위로한다고. 그리고 응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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