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쨍아리 Sep 15. 2024

나의 포기

난, 잘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대한민국 서울의 한 청년이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사이드 잡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틈나는 대로 독서도 했다.


자기계발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부터 내내 아주 기본이었다. 그러나 내 가족의 입원이 결정되면서 이런 나의 열심을 모조리 다 뒤로 두어야 했다.




처음에 할아버지의 응급실 가는 길을 동행 할 때엔, 응급실에 도착만 하면 바로 처치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잠시 하루 동안 일어나는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다.

간혹 살아가다 보면 그럴 일들은 종종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범위였다.

키우던 고양이한테 좀 세게 물려 처치를 받으려 응급실을 다녀왔던 몇 년 전처럼 말이다.  

   

응급실에서 검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언제 치료가 끝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서 전전긍긍했다.

금방 치료받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랐던 나. 참 안일하게도 생각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위중했고, 처치를 한다기 보다 우선 중환자실로의 입원 결정이 내려졌다.


그 소식은 병원 생활이 쉽지 않을 것이고, 길어질 것이라는 이야기 였다.

뭐부터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하나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 대해 내려진 진단명은 호흡이 어려운 수준의 ‘심부전’.

인터넷에 간단한 검색만 해도 증상에 대한 자료는 쏟아졌다. 반면에 할아버지가 있게 된 CCU.

심혈관내과중환자실 관련된 정보나, 이 병원에서의 입원생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직접 겪으면서 알아가야 하는 상황. 이때부터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누가 겁을 준 것 도 아닌데 말이다.     


    

그 누구도 나한테 ‘너가 다 해야 하니 각오하라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나는 이 집안의 장녀로서, 엄마의 무리한 부탁에 제일 마음이 약해 항상 들어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고도 좋은 소리는커녕 왜 더 잘 들어주지 못했는지 능력 부족을 지적받는 사람.

30여 년을 이렇게 살아오는 것이 아주 제대로 학습된 나. 



처럼 집에 큰일이 벌어졌을 때 처음엔 당연히 집안의 현재 가장인 엄마가 먼저 도맡겠지만, 그녀가 가장 편하게 부탁을 하고 나는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딸이다. 자연스럽게 마음 속 각오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내 앞에 놓여있던 것들을 돌아보았다.

당장의 내 생활 중 가장 크게 차지하는 건 누가 뭐래도 돈벌이가 아닐까. 정말 놓치기 싫었다.

그걸 어찌 알았을까, 가족회의 결과를 전달하는 엄마의 입에서 내 일자리를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가장 포기하기 싫어하는 걸 알고 콕 찝은 것처럼.



그런 나는 이것 또한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자신이 프로 K-장녀가 된 것 같아서 참 싫었다.

아마 가족 모두가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간병을 위해 누가, 어떻게, 얼마나, 포기하고 희생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을 것이다.     



내가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 말고 이유가 있다면 들어봐야 했다. 가장 포기를 쉽게 할 사람이라는 시선 말고, 다른 이유가 있어야 했다.

과연 내가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을까.

역시 엄마는 T다.




설명이 시작되자 경제적으로 접근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간병인을 쓰자면 하루에 얼마인데, 지금 현재 내 월급은 얼마이니 하루 일당으로 치면, 내가 간병을 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또 현재 당장 일을 그만 두더라도 재취업이 가장 쉬운 사람을 택하게 되었다라는 설명이었다. 다 너무 말이 되는 이야기라 알겠다는 대답 외에는 할말이 없어졌다.     








그렇게 다음 날 나는 주간 간병인이 되었다. 병원에 다른 사람들을 보면, 간병인을 고용한 환자도 보이고, 가족이 간병하는 환자도 보인다. 2-30대인 나와 동년배인 보호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환자 대부분이 고령인 심혈관내과 특성상 아무리 자녀가 보호자라고 해도 거의 내 부모님의 나이 대이다. 5-60대. 고용된 간병인 분들도 경력과 함께 연배도 있어 보이는 분들이 하고 계셨다. 어딘지 모르게 외로웠다.     



언제 종료될지 모르는 나의 실업사태 (사태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 가족을 사랑하기에 기꺼이, 완벽히 해내고 싶은 보호자 역할. 두 가지의 상황이 맞물려서 나는 “열정적인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열심을 다하면,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 치료가 빨리 끝나고 내가 포기한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나는 이런 모습이었다.



잠깐 머리를 뉘인 듯 싶다가도 발소리만 낫다 하면, 벌떡 일어나 의료진들과 소통할 태세를 갖추는 나. 간호사에게 건네받은 알약들에 빠진 것이 있는 확인하고 다시 처방받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없었고, 지적한 것도 없었는데 하나하나 작은 것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하려고 했다.    


 

제일 큰 돈벌이 외에 내 인간관계 등 일상의 대부분을 멈추고 포기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더 열심히 병원생활에 임했다. 내가 요구 받은 것을 아무리 잘 수행해도 칭찬받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게 내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30여년을 몸에 익혀 온. 어쩌면 이번 간병은 내가 더 완벽한 K장녀가 되어 내 사랑을 보여주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내심 기쁜 마음으로 그간 지냈었는지 모르겠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냥 지금 내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저건 장녀라서 가능한 건가? 싶은 생각을 누구라도 할 수 있을 정도 이기를 바랐다. 내 사랑의 크기를 그렇게 표현해왔던 것 같다. 그렇게 더욱 완벽한 장녀가 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른 가족말고 왜 나만 요구받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좋은 소리는 못 들을까?”라는 생각이 가끔 고개를 든다. 잠재워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내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 이러하듯, 내 가족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도 있을테니까. 우리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들이 맞물려서 만들어낸 이 결과. 이 경험은 나를 새로운 시선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성장시켰고, 또 내가 나눌 여러가지 병원 이야기도 갖게 해주었다. 일도 잠시 포기했던 만큼, 내가 가진 일에 대한 열정이 어떠했는지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잠시, 매번 똑같이 일하는 것에서 벗어나 할아버지 간병의 경험도 쌓고 

그렇게 이야기거리도 쌓이고, 글도 쓰고.



더구나 K장녀로서 더 완벽해지는 느낌도 들고. 이거 완전 선물 같은 기회였지 않은가?

완전 럭키비키자나!! 






작가의 이전글 외래 다니기, 희생이란 건 말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