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 Han Feb 06. 2022

유튜브 명상 가이드가 너무 싫다(2)

명상에 대한 오해, 지금이라도 풀고 가자


들어가며


유튜브 명상 가이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유튜브라는 플랫폼에게만 있을까? 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금 유튜브 명상 가이드들이 구린 것은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앞으로의 유튜브 명상 콘텐츠는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튜브가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튜브 명상 업계가 5점 만점에 2점도 받기 어려운 원인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명상 가이드가 구린 이유는 '명상'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많은 철학적 개념이 그렇듯 명상은 복잡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해의 여지가 많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유튜브 가이드에서도 그런 오해가 영상의 형태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지금의 유튜브 명상 가이드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90년대에는 명상 가이드 테이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였을 것이고, 녹음매체가 없던 시절에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필사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났을 것이다. 명상이 대중 앞에 데뷔하는 그 순간부터 명상에 대한 오해는 있어 왔을 것이고, 유튜브는 그 오해의 2020년형 버전일 뿐인 것이다. 


오늘은 명상에 대한 오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유튜브 명상 가이드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명상법'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명상법을 명상의 본질로 잘못 이해한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명상이고, 촛불을 바라보는 것이 명상이고, 화두를 잡고 있는 것이 명상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생각을 흘려보내는 행위, 바디스캔을 하는 행위, 건포도를 음미하는 30분의 순간이 명상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것이 명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계속 명상을 이어나가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명상법을 명상의 본질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명상은 과정이 아닌 '명상 상태'라는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명상법은 어디까지나 그 상태에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들어가기 위한 다양한 방편이자 도구로 바라봐야 한다.

이 흔들림없는 자세... 이 분(?)이야말로 명상의 대가?! 일 리가

물론 명상과 관련된 많은 긍정적 효과들은 명상법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다. 심리학과 뇌과학에서 밝혀진 주의 조절 효과, 인지 및 정서 조절 능력의 향상은 명상을 책으로 읽고 머릿 속으로 이해했다고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며, 명상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은 일반적으로 한다, 수행한다 와 같이 동사 중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니 그럼 이 말은, 명상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명상법, 명상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명상법이 명상의 본질이 아니라니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조금만 더 내 말을 들어 보시라. 명상법은 명상의 본질이 될 수 없다. 명상 상태가 명상의 본질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니까 내가 위에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명상은 그냥 그 개념의 구성 자체가 태생적으로 헷갈린다고..)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명상 상태가 명상의 본질인 이유 : 견월망지의 비유


왜 나는 자꾸 명상의 본질을 명상 상태라고 부르짖는가? 다른 명상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만 혼자 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뭇 사람들의 명상에 대한 헷갈림을 경계하며 그러지 말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는 과거부터 끊임없이 제시된 바 있다. 혹시 '달을 가리키는데 자꾸 손가락만 본다'는 비유(견지망월)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불교 경전 중 능엄경 및 능가경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하는데, 이 비유에서 명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sukbongcho/10157104127

여기서 말하는 달은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깨달음, 열반, 해탈, 결과, 지향점, 등등...)을 비유한다. 그리고 손가락은 (달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달을 안내하기 위한) 방법(명상법, 과정, 방편, 형식, 등등...)에 해당한다. 경전에서는 사람들이 달과 손가락을 헷갈리는 것(1) 뿐만 아니라, 손가락을 달로 연결지어 잘못 이해하는 것(2) 역시 걱정한다. 한 술 더 떠, 달을 알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잊어야' 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잊음, 내려놓음은 불교의 번뇌-집착 개념과 더 맞닿아 있어 오늘의 주제에서는 조금 벗어나 기회가 된다면 다른 글에서 건드려 보도록 하겠다).



견월망지 해석하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풀어 써보자. 

어떤 외계인이 나에게 '달이 대체 뭡니까? 대답하지 못하면 당신의 목숨은 없다.' 라고 물어봤다. 그 행성 말로 달이 뭔지, 손가락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달에 대해 장황히 설명할 능력이 없던 나는, 최후의 방법으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제발 이해해라..).' 라고 속으로 빌었다. 그랬더기 그 외계인이 내 손가락을 유심히 보며 '그럼 그 다섯개 달린 그것 중에 당신이 펴고 있는 두번째 것만 달에 해당됩니까? 나머지 접고 있는 것들이나 반대편에 있는 다섯개는 달이 왜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뭔 ...댕같은 설정이야?!

달의 디귿 자도 모르는 사람이 달이 무엇이냐, 혹은 달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하늘에 있다고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달을 모르는 사람이 하늘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다소 안일하게 보인다. 아마 하늘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이고, 땅이 아닌 것이 하늘이라 하면 땅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이다. 운좋게 보름달이 떠 있어, 저 둥글고 빛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둥근 게 무엇이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렇다. 이 사람은 애초에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내게 남은 옵션은 비언어적으로 달, 혹은 달의 위치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손가락을 쓴 것이다. 질문한 사람이 운이 좋다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상의 선을 설정하고, 그 선의 방향으로 본인의 시선을 옮겨 그 선이 도달하는 지점에 있는 어떤 개체를 지각하고 그것이 달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뻗은 손가락의 각도와 질문자의 시선 각도가 달라(아마도 나와 질문자 사이의 거리가 멀 수록) 내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가상의 선을 질문자가 따라갔을 때의 도달점이 내 예측과 다르면 어떨까? 


사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손가락을 써야만 할 이유는 없다. 젓가락으로 가리켜도 되고, 나뭇가지를 주워서 달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적극적으로 모션(삿대질)을 줘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강조할 수도 있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졌으니, 천문대에 가면 볼 수 있는 강력한 레이저 포인터로 달을 직접 가리킬 수도 있을 것이다.

와 이걸로 알려주면 직빵이겠네..

대부분 사람이라면 이 정도 노력으로 달의 위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만약 질문한 사람이 애초에 달을 손가락으로 착각해 버렸다면? 앞으로 그 사람은 살면서 영원히 달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달과 비슷한 것을 발가락이라고 생각하거나, 달은 땅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하늘을 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을 더 잘 이해시키겠다고, 손가락 대신 젓가락, 나뭇가지를 등장시키는 순간 이 사람의 동공은 심한 지진을 일으킬 것이다. 비장의 무기로 레이저 포인터를 가져와 아무리 달을 가리켜도, 질문자는 더이상 손가락이 등장하지 않음에 더 큰 헷갈림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이상한 이야기 보따리는 여기서 그만 끝내고,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본론으로 들어가자. 한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달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달에 대해 알려주는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설명 과정에서 어떤 이유와 상황이 발생했더라도 달이 아닌 다른 것을 질문자가 달로 착각한다면, 그 설명은 잘못된 설명이다. 두번째로, 실제로 달을 가리켜 달의 위치를 설명하는 방식은 이외의 다른 방법이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좋은 방법이며, 그것을 가리키는 도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무엇으로든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질문자의 배경지식이 넓을수록, 좋은 도구를 갖고 있을 수록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쉽게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특히 좋은 도구일수록) 한번 처음에 헷갈려 개념을 잘못 잡는 것으로, 이 경우 아무리 달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줘도 질문자가 아무 답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실제 명상, 명상법, 명상상태의 개념을 가지고 위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요가, 불교, 마음챙김, 사이비종교(!) 등 어떤 명상법을 쓰더라도 명상 상태만 경험한다면 크게 상관 없다. 
명상 상태를 경험하기 위한 방법론은, 효과를 기준으로 몇 가지로 수렴되는 편이기는 하고, 요즘은 그 방법론이 꽤 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 경험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명상 상태를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명상을 수행한다면 영영 명상 상태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달 vs 손가락


명상에 대한 오해를 안고 산다고 해서, 핵폭발이 일어난다거나 공룡이 살아돌아와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등의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논의가 무색하게도, 오해나 착각을 갖고 명상을 시작했더라도, 명상을 수행하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저절로 이런 오해가 풀리며 명상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사실 이런 논의가 다 부질 없어지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오히려 명상법 중심의 가이드가 다소 구리더라도, 그로 인해 명상을 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명상법이 더 중요한 명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지 않냐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과연 달이 중요할까, 손가락이 중요할까? 손가락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손가락은 일상 속에서 나에게 밥도 먹여주고, 옷도 입혀주고, 내 몸에 붙어서 인생의 여정에서 수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요긴한 것이다. 반면 달은 저 멀리 고고히 떠있으면서 운치도 있고, 밤동안 환히 빛도 밝혀주고, 조석간만의 차를 만들어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 대한민국 서해안의 리아스식 해안 환경에서 해양 자원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지구에 없어서는 안될 위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달의 존재를 무시하면서도 아무 문제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나만 해도 손가락 VS 달로 밸런스 게임을 하면, 손가락을 선택할지 심히 고민이 된다.)   

밥 vs 책, 돼지 vs 소크라테스 등 널리 던져진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말은, 손가락이 요긴하다고 손가락이 달이 될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다. 손가락이 요긴하기 때문에 손가락을 달이라고 말하겠다는 선언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의 차원에서 '틀린 선언'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논리에서 나는 명상 상태(달)가 아닌 명상법(손가락)을 명상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명상 가이드가 피안내자가 반대로 생각(명상법이 명상의 본질이구나)하게 만들거나, 헷갈리게 방치하는 형태로 제작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태가 명상의 본질인 두 번째 이유 : 본질의 특성


명상 상태가 본질이 아니고 명상법이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비유를 떠나서 논리적으로도 명상법은 명상 상태를 넘어 명상의 본질이 될 수 없다. 명상의 상태는 변하지 않지만, 명상법은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고, 단계마다 다르다. 과정이자 행위, 방식에 해당하는 명상법은 사람마다 다르고, 개인의 수준에 따라 변하지만, 결과이자 상태, 자리로 표현되는 명상 상태는 특정 수준에 도달한 인간이라면(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인간에 속하고 인간의 사고행위를 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면)모두 동일하게 경험하는 특정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법이 본질이 될 수 없고 도구적 역할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태(명상 상태)와 행위(명상법) 중 더 변하지 않는 것은 상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명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 상태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는 있어도, 그 상태는 모두 동일한 하나의 상태임을 전제한다. 비단 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변하는 것에 비해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는 가설을 부정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라고 착각하는) 나 역시도 자꾸 바뀌고 변하기 때문에 앗싸리 

'아닌 것을 있다고 자꾸 착각할 바에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나로 그만 규정해라(무아)'

고까지 말한다. 


명상의 본질이 무엇이냐? 는 질문은 이보다 더 깊게 들어가려면 얼마든지 깊게 들어갈 수 있다. 상태 및 행위차원에서 명상의 본질은 규정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앞으로 탐구해야 할 수많은 것들에 비하면 어려움을 느껴서는 안되는 일종의 초보자용 튜토리얼인 셈이다. 그런데 이 정도 개념 탐구조차 초반에 어렵다고 대충 뭉개고 넘어가 버리면 그 사람은 앞으로 명상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될까?


는 소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명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꾸 불필요한 비효율이 발생할 텐데, 어떻게 명상을 즐기겠냐는 말이다. 특정 명상법에 집착이 생기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탐구를 하다가 목표를 향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빙 돌게 되고 헛다리를 짚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이것은 나 스스로도 경험했고, 주위를 둘러봐도 심심찮게 보인다(명상 강의에 올라온 댓글을 가서 살펴보라. 정말 이 사람이 영상을 보고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낮은 수준의 댓글이 심심찮게 보인다.)  


나중에 단게에서는 명상 상태조차도 내려놓고 집착하지 말라는 퀘스트를 깨야 할 텐데, 초반부터 핀트가 어긋나 불필요한 집착과 화로 자신의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될 일이지 않는가? 



데꿀멍 가이드에 대처하는 명상 피안내자의 자세


똑똑한 소비자는 제 밥그릇을 자기가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다. 이 법칙은 명상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어쨌든 나는 여러분이 명상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시간 투자를 지속하기를 바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나 좋을 대로 신나게 불평을 늘어놓았다면 그 다음에는 여러분도 좋을 수 있게 솔루션을 드려야 할 일종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솔루션을 드리고자 한다.

 

우리 함께 똑똑한 소비자가 되기 위해 노래도 불러보자

1. 애초에 본인이 명상의 개념을 이해하고만 있으면, 명상법 중심의 가이드 소비도 얼마든지 좋은 선택이다.

결국 핵심은 간결하다.

 명상의 본질은 상태임을 인지하고, 항상 그 상태를 지향하면서 명상법은 도구로써 이해하자. 

명상법에 집착할 것이 없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높은 구독자, 많은 조회수의 가이드라고 해서 꼭 내게도 효과가 있으리란 법이 없고,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가이드를 삼는다(아이돌 안무영상을 보며 명상 상태에 들어가 보겠다)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단, 명상의 개념에 충실한 방식으로 가이드를 구성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 말하겠다). 제대로 된 명상 가이드가 없다고 명상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명상 개념은 브런치에서 이해하고 명상 가이드는 필요하다면 아무거나 골라 듣는 것이 더 낫다. 


2. 가이드를 메타적으로 분석하는 것 자체가 명상 훈련이자 명상법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자.

명상 개념에서 창의력은 생각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똑같은 사안 속에서 더 자명한 판단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근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구리다 라는 상황은 내 명상 경험을 구리게 만든다는 피상적이고 직관적인 결과만 만들지 않는다. 그 구린 가이드를 어떻게 재정의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내 명상 경험이 정반대로 더 좋아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혹자는 이것을 단순히 말장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어떤 정신적 역량, 능력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충분한 역량(명상에 적합한 신체)을 가지고 있다면 실제로 이런 식의 세상살이가 가능하고 이 또한 일상 속에서 명상이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효과임에 틀림없다.

명상의 일상적 적용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것이다.

명상 훈련에 진입하는 첫 번째 중요한 키워드는 알아차림이다. 가이드의 잘못된 부분을 스스로 알아차림하는 것이 명상 훈련이 왜 될 수가 없는가? 오히려 명상 가이드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녀 그 상황에서 나 라는 인식의 주체, 의식적 주의가 뒷전에 놓이는 것이 더 반명상적인 행동 아닐까?    



명상에 대한 오해는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명상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명상이 이해하기 어려운, 만만치 않은 것을 명상 말고 누구에게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잘못 시작하면, 드럽게 재미없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 개념을 글로 읽는 것 만으로 충분한 명상 능력이 생긴다면 이런 오해가 생길 일도 없다. 명상 하나 해보려고 마음 먹으면, 명상의 개념은 개념대로 이해해서 명상 마인드를 갖춰야 하고, 그 와중에 명상 상태를 직접 경험하는 것도 필요하며, 그러려면 명상법을 배워 훈련도 틈틈이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초심자가 이 셋 중에 무엇을 먼저 접해야 가장 효율이 좋을지는 명상 안내자로써 정말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초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셋 중 가장 만만한 것은 아무래도 명상법일 수 밖에 없다. 명상은 글이나 설명 같은 간접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스스로의 경험과 체험을 하려면 무엇이든 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것만 단편적으로 쫓다 보니 명상법만을 따라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명상법이 명상의 본질적 행위라고 잘못된 결론을 지어버리는 것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이런 명상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 안내자라면, 적어도 가이드를 만들 때 지금보다는 더 고민을 해야 한다는 내 얘기가 나만의 오바쌈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R&R(Role and Responsibilities)이라는 개념이 있다. 명상이라는 생태계를 여러 플레이어들이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명상 가이드의 문제를 고민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사람은 명상 초심자도, 명상가도, 스님도, 요기가 아니다. 스스로 명상 안내자를 자처한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명상 안내를 하겠다고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에게는 윤리적 문제까지도 제기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마치며


명상 가이드가 100개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면, 그 중에 10개 정도는 명상 상태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고, 명상법과 명상 상태를 구분해서 개념화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외국 영상까지 포함한다면 100 중 30 이상이 제대로 된 가이드일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그 10개에서 30개 되는 제대로 된 가이드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대책없이 억까만 시전하는 것이 아니다. 10에서 30%의 좋은 콘텐츠 비율을 과반 이상으로 끌어올려, 명상 콘텐츠의 생태계의 질적 성장을 꾀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바람직한 명상 생태계, 나부터 하나하나!

지금도 본인의 삶 속에서 괜찮게 명상을 하고 있는 명상가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여러분이 존버한 결과 찾아낸 소수의 좋은 콘텐츠를 통해 명상 경험을 즐거이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여러분의 실력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운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불교 명상적으로 표현한다면, 과거로 부터 쌓은 업의 보로 인연이 좋게 잘 닿았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인이 알고 있는 좋은 콘텐츠가 있다면 혼자 즐기기 보다는 부디 우리 함께 끌올하여 전면에 내세워 놓자. 유튜브에 명상 가이드를 검색하면 상위 검색 결과에 그런 좋은 콘텐츠가 먼저 뜰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처음 명상의 생태계에 발을 들이는 사람이 헛걸음하지 않고, 실망하여 떠나가지 않도록 해야 이 업계가 성장할 것이 아니겠는가?


(브런치에는 아직 댓글에 하트 찍는 기능이 없는지 달아주신 소중한 댓글에 대한 리액션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지난 글에 반응을 보내주신 분께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작가의 이전글 유튜브 명상 가이드가 너무 싫다(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