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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Jan 16. 2024

불빛 아래 추억여행

대화의 단서


손바닥으로 모래알을 쓸어본다. 주름진 손금에도 손바닥은 평평하다고 모래를 반듯하게 두들기며 곱게 다져본다. 그렇게 아무것도 쓰지 않아서 아무거나 쓸 수 있는 종잇장을 얻은 것 같고, 뭐든 쓸 수 있는 손가락도 있다. 그렇게 한 손만 있으면 몸을 쪼그리고 앉아 에이비씨디, 일이삼사, 나와 엄마 그리고 친구 이름을 몇 개 쓰다 눈앞에 정글짐을 그려보고 부리 큰 나는 새와 파마머리를 한 것 같은 몽실몽실한 나무를 그리며 논다.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몸의 중심을 앞뒤로 오가면서 말이다.


어린 날 놀이터에서 그러고 놀았다.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라는 말은 저녁 먹기 전 손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 형광등 아래에서 손금에 낀 모래가루가 반짝이풀처럼 빛나는 걸 보았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을 다시 불렀을 거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하면 보고 듣는 세상이 젓가락 두 짝처럼 같아서 어려운 게 뭐예요? 세상은 아름답잖아요를 매일 체득하며 자랐다.


놀이터에서 놀다 들어와 학습지 몇 장 풀다 보면 밥 먹어라 과일 먹어라 하는 소리에 후다닥 가서 언니 옆자리, 동생 옆자리, 엄마 옆자리 짝을 바꿔가며 오봉 위 식탁 위의 무언가를 같이 먹었다. 무언가를 하다 보면 결국은 함께 뭔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만화, 드라마도 같이 봤다. 수십 편 수천 개의 장면이 있었을 텐데 만화영화하면 금발의 메텔이 아픈 얼굴을 하고 거적때기를 걸친 철수를 떠나는 장면이 제일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늘씬하고 예쁜데 항상 피곤해 보이는 메텔이 빨래 개던 엄마를 닮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애가 셋이나 되던 엄마는, 손 보태주는 사람 없이 오인 분의 집안일을 해내던 슈퍼맘이던 엄마는 드라마도 보고 싶고 애들도 챙겨야 했다. 그래서 TV를 볼 때면 엄마는 종종 귓밥을 파주셨다. 그러나 멀티로 하기엔 귀는 몹시도 예민한 기관이었다. “악” 외마다 비명이 자주 나왔고 피딱지가 생기기도 했다. 그때 우리들의 저녁시간은 아름답기만 할 틈도 조용할 틈도 없었다. 그래도 분명한 건 부엌, 현관, 안방, 작은방의 모든 등은 꺼지고 오로지 거실불만 켜진 그곳이 사람의 소리가 유일한 그곳이 최고의 공간이었다.


혼자 지내는 집에서 종종 나는 아주 제멋대로 군다. 부러 그러듯이 말이다. 책상 위로 발을 뻗고 의자는 흔들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뒷다리 두 개를 꼭짓점 삼아 앞뒤를 왔다 갔다 한다. 옷을 뒤집어 입거나 앞뒤 반대로 입거나 때론 아무것도 안 입고 누워있다. 혼자 살면 할 수 있는 것들이란 이런 거였다. 혼자 살수록 알게 되는 사실은 나는 가족과 살던 시간을 꽤 많이 좋아했단 거다. 나이 먹고 취업해서 자연스럽게 떠나왔는데, 추억 속의 동네는 별이 가장 낮게 걸리는 아름다운 곳이듯 가족과의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한 것 중에 가장 애틋한 기억이 되었다.


거실 문 밖으로 빛과 소리, 웃음, 온기 모두 새어나가도 금세 차고 넘칠 곳간 같았던 그날들은 언니가 중학교를 다니고, 밤 열 시, 열한 시, 열두 시가 되어 들어오면서 동력을 잃었다. 그 뒤로 둘째인 내가, 셋째인 막내가 야자니, 자취니 하면서 사라졌다. 이제는 365일 중에 열흘 남짓. 그러니까 부모님 생신, 명절같이 다 모이는 날 엄마 주변으로 그때의 어린 셋이 큰 덩치를 하고 앉아있다. 벽난로 같은 불빛을 내는 TV 모니터가 여전하다. 어렴풋이 그때의 분위기가 살아난다.


시곗바늘을 이십 년을 감아 먼 추억여행을 다녀오니, 그 시간이 좋았음을 아는 건 물론이고  세상 모든 것도 무섭지 않게 만들어 줄 것 같던 우리의 거실, 그 방공호를 대체 무엇을 하다 까먹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어쩌다가 잃어버렸을까. 예나 지금이나 엄마 방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는 아빠는 알까. 손금에 모래가루를 보고 모래알은 반짝을 큰 소리로 불렀던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대답 대신 돌아올 질문들이 더 많을 것 같아서 묻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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