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주 예쁜 말을 들었다. 작은 동그라미였던 우리가 애써서 좀 더 큰 동그라미가 된다면, 넓어진 만큼 경계선도 늘어 더 큰 불확실을 겪게 된다고 말이다. 이 말이 예쁘게 들린 까닭은 그래서 살다 보면 생은 괴로움이란 말이 있겠구나 싶었고, 그다음으로는 매일 그 힘든 걸 해내는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람 모두가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경계선이 확장되고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말인가.
기껏 용써서 큰 동그라미가 되었는데 원치 않은 걸 감내하라 한다면 어떨까.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무리했던 상황이 타인과 얽힌 일들이어서, 누군가와도 같이 있기 싫고, 퇴근 후 아무 연락도 받고 싶지 않았다. 상대를 맞추느라 무리한 나를 탓할 힘은 쉬고 난 뒤에야 가능할 것 같았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연락도 한참 뒤에야 확인했단 이유로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이면지 위에 썼다. 단어가 문장이 되고, 이해가 생길 때까지 그저 써보았다.
‘끼어드는 생각, 계속 바뀌는 계획, 옹졸함’이란 단어가 맨 첫 줄에 적혔다. 그다음에는 ‘무시하고 싶은 마음’ 그다음으로 ‘지금 내 마음에 누구와 함께 뭔가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문장이 쓰였다. 누군가와 같이 있다 보면 과장된 반응을 하거나 눈치를 살핀다. 반대에 가까운 두 행동을 동시에 하다 허무해져버렸나 보다. 그래서 다음 문장은 ‘차라리 혼자가 편해’로 귀결됐다.
‘혼자가 편하다고 해서 나 빼고 다 죽어라고 할 수 없잖아.’ 극단적이지만 설득되는 문장이 따라붙었다. 어울리다 보면 불편할 때도 있지. 그럴 때도 있지. 어느새 수긍의 고갯짓이 위아래로 박자를 타고 있었다. 두 가지의 비유 상황도 쓰였다. 출발신호를 기다리면서 긴장한 달리기 선수와 수심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물속으로 뛸까 말까 하는 사람. 불편한 상황을 끝내려면 뛰어야 하는 건 맞는데, 출발신호 없이 뛰면 실격이다. 뛰고 후련할지 후회가 남을지 알 수 없다. 실격했다면, 후회가 남았다면 스스로를 미워하게 될까? 난 지금 뭐가 무서운 걸까. 아직도 웃음 속에 불안을 숨긴다. 과장된 몸짓은 핸드폰을 끄고 몇 시간을 혼자 있어야 나아질지 알려주지 않는다.
모른다. 모르지만 글을 쓰는 동안 기분이 괜찮아졌다. 괜찮지 못한 기분에 집중해서라기보다는 괜찮지 못한 기분과 동떨어진 어제의 동그라미 경계선, 그 경계선을 떠올리며 생각나는 아무개의 얼굴들. 언젠가 회사를 10년 이상 다니면서 크게 아픈 데가 없는 선배들이 존경스럽다고 했던 말과 닮은 것 같아서 또 그렇게 아무개의 얼굴이 추가되었다. 이번에 끼어든 생각과 바뀐 마음에는 옹졸함이 없었다.
치유엔딩으로 짜놓고 쓴 글이어서 혹은 편안한 기분이 들 때까지 혼자 써내려 간 시간이어서 혹은 글과 시간의 조합으로, 나는 ‘글 쓰려고 기분이 나빴나?’라는 쉰소리가 나올 만큼 괜찮아졌다. 어제 동그라미 경계선 이야기를 들을 때, 나보다 보통 사람이 생각난 것이 신기했다.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을 나로 두는 게 익숙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보편에 기대어 누군가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오늘 어제와 같은 말을 해본다. 누군가 나처럼 사람에 치여 기분이 꿀꿀하다면 편안해질 때까지 아무랑도 섞이지 말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고. 더 큰 사람이 되어 늘어난 경계선의 햐 가닥이 그러자며 보내온 신호라고 말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신호는 이렇게 별로인 기분으로도 오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