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케이 Jan 10. 2024

우린 혼자가 아니지

대화의 단서


친구 담이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연상된 건 메모종이였다. 작년에 내 목표는 친구 네 명의 이름으로 시작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휴가를 즐기고 온 친구 1처럼 새 여행으로 리프레시하기, 친구 2처럼 쩨쩨하지 않고 통 크게 굴기. 그중에 친구 담이에게서 닮고 싶은 모습은 대략  가장 촌스럽게 표현하자면 인심 좋은 사람 되기,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줄 수 있는 사람 되기 같은 모습이었다.


오늘 담이가 생각난 건 새해가 시작된 지 열흘이 되어서가 아니다. 해 지난 목표 달성을 점검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 안에 아주 그득한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정체가 불명확한 이 불만은 욕심과 무지에서 비롯됐다. 올해부터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이 주요했다. 기존의 일들과 병행하면서 새로운 공부의 시작은 처음에 그저 설렜다. 설렘이 한 달이 지나자 열심히 해야지라는 각오가 들었다. 문제는 자부심이 옅어져 가는 지금에도 개강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남았단 거다. 부담감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 부담감에 제동을 걸 방법은 마땅치 않았다. 슬며시 불안의 크기가 설렘을 압도하고 있었다.


잘 해내야지라는 단 하나의 목표는, 출발 신호만 기다리면서 긴장만 반복해 갔다. 생각이 그쪽으로 향할 때, 마음은 분주해지고 몸은 둔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다른 쪽으로 한 눈을 팔아봤다. 신년회, 데이트, 맥박이 168pm까지 올라가는 격한 운동, 관련 책 읽기 등을 시도했다. 그런데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마음이 불편하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날치의 불편함을 해결하지 못한 채 불편거리는 늘어갔다. 대학원은 나 좋아서 가는 건데, 등록금까진 못해줘도 입학비는 내주고 싶다며 엄마가 공 6개짜리의 금액을 송금해 왔다. 직장 n연차인 내가 그 돈을 돌려주지 못하고 받았다. 엄마의 통화 직전 주말데이트로 스키장을 결제하는 중이었다는 것에도 찔렸다. 집에서 쉬는 것보다 일가는 게 좋다며 주말에도 일을 가는 엄마와, 손이 부어 아프다며 투정하는 엄마의 이야기들을 그저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벌었으면서 나한테 쓰면 어떡하냐는 말을 했을 때 엄마는 쓸 때 쓸 줄 알아야 진짜 부자라는 말을 했다. 나는 엄마를 부자로 만들어줬다기보다는 등골을 휘게 한 것만 같아서 못난 자식으로 마음이 찌그러졌다. 스키장을 가기로 한 걸 상대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마음이 계속 흩어지고 무표정한 시간이 길었던 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 친구 담이에게 보내야 할 것이 있어 보낸 다음 정산을 받았는데, 담이는 정산에 곧이어 커피 쿠폰을 보내왔다. 고생했다면서 말이다. 여유가 없어서 늘여보겠다며 몸을 쓰고, 머리를 쓰는데 좀처럼 편해지지 않을 때, 내가 아는 마음 넉넉한 사람을 보고 있자니 생각지도 못하게 분주함이 잠깐 멎었다.


정신 사나울 땐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점심시간에 밥 대신 러닝머신을 뛰어다닌다. 밥 대신 하는 운동에 몸이 편할리가. 즉흥파 친구를 계획형인 내식대로 유도하는 과정에 웃음이 넘칠리가. 도움에는 고마움보단 미안함이 먼저인 내가 자꾸 받기만하면 괜찮을리가. 아무것들을 자꾸 아무것도 아닌 척 해도 분주한 불편함이 반복되었다. 서두름이 익숙한 나는 여유를 말하며 서두르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친구를 보면서 거짓 없는 여유를 발견하고 그제야 녹아드는 거였다.


머릿속 질문우 계속된다. 마음에 들 문장 하나를 얼른 마련하라고 한다. 하지만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답은 계속해서 공백이고, 속여지지 않은 나를 속이자니 압박감만 심해진다. 누군가 나와 닮은 상황에 있다 스스로 답을 내기 전에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곁에 잠시 머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들어보고 싶다. 당신도 숨차게 부풀던 걱정주머니가 피융하고 바람 터지는 순간이 생기던지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편지지를 고르셔야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