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단서
같이 있어준다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된 건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이었어. 아빠가 사람을 죽였는지 사기를 쳤는지 욕받이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피구공으로 코피를 내고, 여자애의 코에 코피를 낸 자기는 친구들에게 심했다며 욕을 먹었어. 그렇게 욕받이 친구는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보건실로 갔어. 열두 살은 됐는지 모르겠는 그 초등학생은 욕을 먹고 친구는 코피가 터졌지만 멀리하려던 친구들의 마음을 단박에 바꿔 아이들 무리 속으로 옮겨버리더라고. 난 감탄했지.
다음 장면도 좋았어. 코피 난 친구의 하굣길을 따라가. 따라오지 말래도 계속 따라 가. 왜 따라오냐고 친구가 소리치는 그 순간 울어버려. 울며 하는 대사는 들리지도 않았어. 어떤 대사를 했던 의기소침해진 친구의 모습이 속상해서 운다는 걸 알아. 자존심에 울지 못했던 친구에게 “울고 싶은 건 난데 네가 왜 우냐”는 명분을 줘서 쪽팔리지 않고 울어버릴 수 있게 울려버려.
나는 멈춰버렸어. 마음이 울렁거리면서 뚜렷해지는 말들이 있어서 나는 보다 말고 멈췄어. 그 아이는 자라서 4만 원을 삥땅 치다가 걸리는데, 그 돈을 이내 쓰지도 못하고 돌려주는 애매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된다. 누구는 그 사람을 보면서 또라이라고, 누구는 미워할 틈을 주지 않는 귀여운 애라고 하더라. 나는 조금 놀랐어. 그런 사람을 또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런데 나는, 울고 싶을 사람 앞에서 먼저 울어주는 사람이, 때론 그냥 있는 사람에게 먼저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더라. 그러면 또라이가 된다지만, 내가 아는 욕 중에 가장 칭찬 같은 욕이겠네 싶더라고. 큰 상관없겠다 싶더라고.
대신 욕먹는 사람이 되는 건 너무 용써야 해서 못할 것 같아도 먼저 울어주고, 먼저 웃어주는 사람은 해본 적이 있어서, 잘했던 것 같아서 나는 이왕이면 지금보다 더 자주 먼저하는 사람이 돼야지라고 생각했어. 그러려면 나는 곁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더라. 그 사람 앞에 서 있어야 하더라고. 까짓 것 그래야겠다 하고 잠에 들었는데, 아침에 나는 조금 나쁜 꿈을 꾸고 깨어났어.
바쁠 거란 이유로 헤어진, 그러니깐 나는 버려졌거나 남겨졌다고 생각된 이별을 한 적이 있었거든. 잘생겨서인지, 운동을 잘해서인지 뭐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꿈에서 나는 그와 결혼식을 올렸어. 근데 꿈에서도 그 친구는 바쁘다며 결혼식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짜증을 냈어.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되겠단 다짐을 한 밤에 하필이면 떠나버린 친구의 꿈을 꿀 게 뭐람. 그리고 난 그때의 상심 탓인지 전날 밤의 다짐이 조금 약해졌어.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괴로운지 알면서도 이별이 필요했던 입장도, 혼자의 편리함도 아는 거였지.
남겨진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슬퍼질 걸 알지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먼저 울어줄 수도 먼저 웃어줄 수도 있단 걸 알지만, 이기심이 최선일 때도 있다고 생각할 때를 대비해서였을까. 무의식의 계획이었는지 꿈에서 나는 결혼식이 끝나기도 전에 후회했어.
후회와 미련에 아련함을 섞어 미화하길르 잘하는 나는 조금 더 다른 생각을 했어. 사실 그 친구만큼이나 떠나길 좋아하는 나는, 떠난 쪽이 내가 아녀서 오랫동안 힘들어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힘들어 더 이상 떠나지 못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로 했어. 대신 그들 곁으로 떠나기로. 그렇게 하면 나는 떠나는 거지만, 남겨지는 사람은 없어 모두가 웃는 방법이 되더라고. 자주 그들 이 있는 쪽으로 떠나기로 했어. 머리와 마음을 이렇게 쓰면 나는 이상하게도 항상 행복해졌어.
<이혼>
꿈에서 당신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반지도 사랑도 없는 결혼식이었습니다
얼굴 없는 당신이어서
목소리가 아녔으면 당신인 줄 몰랐을 뻔했습니다
깨어나 중얼거렸습니다
가장 예뻐했던 당신의 눈이 사라졌구나
어쩌지 못해 떠났음을 알아도
버려짐과 남겨짐 어떤 해석에도 아파
당신과 해보지 못해 올린 결혼식은
반지도 웃음도 없고
잘못됐다는 기시감과
얼굴 없는 신랑을 찾는 장인장모가
있었습니다
지워가는 무의식을 따르자
그러는 편이 좋겠다며
뜬 눈을 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