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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케이 Apr 10. 2024

어느 작가의 말

대화의 단서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고, 옹알이를 겨우 시작한 아기가 저를 바라볼 때면 의사표현도 못하는 이 친구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렇게 모두 열심히 살고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들처럼 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을 하면 듣는 이는 어쩌면 성선설을 믿냐고 물을 테고, 그렇다면 네라고 답하겠지.     


곧 생길 조카도, 친구의 아기도, 성인이 된 지 십 년이 되어가는 동생도 나는 자연스럽게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키고 싶다는 생각에는 달리 말하면 위험이 존재한다는 말이고 위협을 아는 경험도 있단 말이다.    


“밤에 큰 소리가 나면 당연히 싸우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밤에 소리가 나도 싸우는 소리가 아닐 수 있다는 건 술 취한 사람들이 신나서 혹은 그냥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소리란 걸, 오 년 넘게 창문을 열고 확인하면서 느리게 배웠어요.”     


잠들었다고 생각한 시간, TV 소리에 묻힐 거라 생각에 늦은 밤에 있곤했던 싸움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싸우지 마’라는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문을 열어보는 용기를 냈고 반사적으로 돌아오는 문 닫으란 명령에 울먹이다 자는 것이 전부였던 때. 그때의 불안이 사라지는 데에는 뭘 불안해하고, 무엇 때문인지 알고, 바로잡을 수 있을 준비를 필요로 해서 이십 년 남짓이 걸렸다.     


밤의 불안이 걷히고 남은 것들은 싸움은 ‘아빠’의 폭력이 아니라 아빠의 ‘폭력’이 문제였단 것, 아빠란 존재에는 ‘폭력을 쓰지 않는’도 있고, ‘폭력을 모르는’도 있다는 걸. 어디까지 이해하게 될진 모르지만, 태어날 때부터 ‘폭력’을 알았던 것도 아니었단 거였다. 그중에 확신은 ‘어쨌든 폭력은 안 된다’였고 지키고 싶은 대상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위험에서 지킬 수 없단 체념이나 절망도 해낼 수 있다는 환상도 섣불리 가질 수 없었다.     


어떻게 답을 내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노트 두 바닥을 채운 건 사실 머리 아픈 과제를 하던 중에 든 생각이었다. 읽던 논문에서 “체제 순응적이다 저항적이다와 같은 식의 판단은, 그 자체로 매우 체제 순응적이고 기존의 지배 권력을 재강화하며 자연질서로 만드는 행위임에도 이 사실은 언제나 은폐된다”1)는 문장을 읽었다. 배경설명인 한 줄이었지만 순응과 저항은 반대의 행위처럼 보이지만, 기존 규범을 인지하는 과정을 통해서 지배 권력은 강화된다는 사실이 은폐된다는 말이었고, 극히 단순화시켜 인지의 반복이 가장 강력하다는 말로 요약했다.     


그리고 이 말을 희망으로 읽은 나의 주장은 이러하다. ‘희망과 낙관을 반복해야 한다.’ 사회는, 세계는 변화해 왔으니 기존에 잘못은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가장 큰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사람은 선하다. 모두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아주 작고 소중한 것을 보고 온 날, 그 대상과 눈맞춤한 순간에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건강하기만 해’라며 바라던 마음은 모두에게 괜찮은 세상이 되길 바라게 된다. 그 시작이 좋은 상상이라면 그쯤은 지금 당장하게 된다.



1) 젠더로 경합/불화하는 정치학, 루인, 2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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