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도 진했던

-붉은장미

by Olive

마을에서 '로사'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초록빛깔 지붕 아래, 온갖 향기로운 꽃들로 가득했던 집.

그녀의 아버지가 엄청난 규모의 꽃밭을 가꾸며, 향수를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조향사였기 때문에,

꽃을 보려면 로사의 집, 정원으로 가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매일 '로사'의 꽃밭을 구경하는 이들이 넘쳐났고, 자연스레 그들은 꽃향기에 취해 로사의 아버지가 만든

향수에 관심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향수를 사겠다며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일은 일상이었고, 그로인해 부를 축적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로사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인색한 구두쇠였다.


"아버지, 저 이 향수 한 병만 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요즘 잠을 통 못자고 있는데,

베갯잇에 몇방울 뿌려두면,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로사, 그건 네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하루종일 책만 봐서 그런 것 아니겠니.

몸이 고단해야 잠이 쏟아질텐데 말이다. 그러니 오늘부터 정원에 나가 애비의 일을 도와주겠니?"


로사의 아버지는 딸이라해도 아주 작은 향수 한병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여쭤봤는데, 역시나구나. 안되겠다. 아버지 몰래 꽃잎이라도 따서, 베갯잇 안에 넣어둬야지."

로사는 오랜만에 뒤뜰 정원을 찾았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 향긋하고 은은하면서도 상쾌한

꽃향기가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로사는 손끝으로 꽃잎을 어루만지다가, 허리를 숙여 꽃냄새를

온몸으로 맡았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향기는 탐스럽고 하얗게 핀 어느 꽃이었다.

로사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그 하얀 꽃의 꽃잎을 조심스럽게 똑똑 떼어냈다.

계속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살피며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만들어 꽃잎을 땄고, 왼손바닥 위에는

떼어낸 꽃잎이 한장 두장 쌓여갔다. 그런데 그 때였다.


"후~"

누군가 바람을 불어, 손바닥 위에 있던 하얀 꽃잎을 바닥으로 다 떨구게 만들었다.

"대체 누가!!"

당혹스러움이 약간의 짜증이 되어, 로사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는데, 처음보는 낯선 남자가 로사를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누...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이곳에서 일하게 된 '바틀레이'라고 합니다."

"아... 새로 왔다는 보조 조향사인가요?"

"네. 아가씨의 이름은 '로사' 맞으시죠?"

"네. 맞아요."

"꽃잎을 이렇게 엉망으로 떼어내서 망가뜨리면, 아버지가 화를 많이 내실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히 괜찮지 않죠. 그러니까 방금 본 건 비밀로 해줄래요?"

"꽃잎을 왜 땄는지 알려주면, 비밀로 해드릴게요."

"아... 제가 요즘 잠을 못자서요. 좋은 향기를 맡으면 잠이 잘 오지 않을까 싶어서..."

"아버지께 향수 한병만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아니요. 우리 아버지는 엄청난 구두쇠라, 고작 작은 향수 한병일지라도 벌벌 떠는 분이세요.

그래서 꽃잎이라도 베갯잇 속에 넣어두려고 그런건데, 제가 꽃을 망가뜨리고 있었군요."

"그럼 아가씨..."

"그냥 로사라고 불러요."

"좋아요 로사. 앞으로 매일 아침마다, 여기 꽃으로 만든 향수 중에서 가장 좋은 향을 한방울씩만 로사에게

선물할게요. 그러니, 매일 아침마다 나를 만나러 이곳으로 나와줄래요?"


꽃잎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바틀레이에게 로사는 한순간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바다처럼 맑은 눈동자와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꽃향기가 로사의 심장을 뛰게했다.

그렇게 로사는 매일 아침마다 바틀레이를 만났다.


"바틀레이는 왜 조향사가 된 거에요? 우리 아버지처럼 코가 예민해서?"

"향기가 가진 힘 때문에요. 잊고 있던 추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그리운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도 만들죠.

마음을 치유하기도 하고요, 사랑에 빠지게도 만들어요. 저도 그런 향수를 만들고 싶어요.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

"부족하다뇨, 그렇지 않아요. 나는 바틀레이가 만들어준 향수가 가장 좋은걸요. 가만히 그 향을 맡고 있으면

행복해져요. 마음이 간지럽기도 하고요, 자꾸 웃음이 나요."

"나는 이런 로사를 볼 때마다 행복해져요. 마음이 간지럽기도 하고, 자꾸 웃음이 나요."


로사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째깍째깍 흐르던 시간도 멈춰버린 것 같았다. 로사는 바틀레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에게 사랑해. 사랑해. 하는 것처럼 들렸다. 로사와 바틀레이 사이에 작은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달콤한 꽃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고, 바람이 싣고 온 향기에 취한 두 사람은 그때서야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바틀레이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로사에게 자신이 만든 가장 최고의

향수 한방울씩 선물했고, 로사의 방에는 바틀레이가 준 한방울의 향수가 한병, 두 병. 점점

모이면서 빼곡히 쌓여갔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웃나라와 전쟁이 나서, 마을의 청년들은 모두 전쟁터로 불려나가게 됐다.


"바틀레이, 매일 밤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로사, 걱정하지 말아요. 반드시 돌아올게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이었기에, 마지막 작별조차 숨죽이며 해야했다.

로사는 매일 밤마다 바틀레이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 기도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전쟁이 남긴 건, 상처와 슬픔 뿐이었다. 거리에는 자식을 잃었다며

통곡하는 이들이 넘쳐났고, 갓난쟁이 아이를 업고 남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로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팔 하나가 없어도 좋고, 다리 하나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저 바틀레이의 심장이 뛰고 있기만을 바랐다. 그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를 꼭 안아주며

이마에,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로사! 로사!! 이리 좀 와보거라!!"

아버지가 다급하게 로사를 불렀다. 로사는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버지의 손에는 작은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아버지... 그게 뭐에요?"

"로사... 바틀레이가 죽었다는구나..."


작은 상자에 담긴 건, 바틀레이의 유해였다. 슬픔이 지나치면 눈물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로사는 알게됐다. 로사는 바틀레이의 유해가 담긴 작은 상자를 끌어안으며, 숨이 쉬어지지 않아

꺽꺽 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버지.. 바틀레이를 이렇게 보낼 수 없어요. 이렇게 보내면 안되잖아요."

로사는 지금껏 모아두었던 향수를 모조리 들고나와 바틀레이의 유해에 한 병 한 병, 아낌없이 뿌려주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눈이 뒤집혔다.


"로..로사! 그 귀한 향수를!! 너 대체 뭐하는게냐! 이미 죽은 사람에게 뿌려봤자 무슨 소용이야!!!"

아버지는 로사의 팔을 낚아챘다. 그러자 로사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놓으세요!! 바틀레이가 준 향수에요. 한방울, 한방울씩 나에게 선물한 향수라구요!"


짝-

아버지는 로사의 뺨을 있는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로사는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 정도의 아픔은 바틀레이를 잃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귀한 향수를 바틀레이의 유해에 뿌려대는 로사의 모습에 단단히 화가 났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던 아버지는 그만, 유해가 담긴 상자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아버지!!!!!!"

"로사! 떨어지거라. 이미 죽은 자를 끌어안아봤자, 그는 돌아오지 않아! 이미 죽었어!!

그 귀한 향수를 더는 이 자에게 낭비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저보다도 향수가 더 소중하시죠! 그럼 제가 없어도 되겠네요!!!"


로사는 남은 마지막 향수 한병을 자신의 몸에 뿌려댔다.

그리고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바틀레이의 유해 곁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불길은 순식간에 로사의 몸에도 옮겨붙었고,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로사는 바틀레이의 유해가 담긴 상자를 꼭 끌어안은 채로 시뻘건 불길 속에 그대로 앉아있었고,

불꽃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불리더니, 끝내 로사는 그 자리에서 바틀레이와 함께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뒤늦게 후회하며 불에 타 새까맣게 되어버린 로사를 어루만졌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파스스 내려앉으며 잿가루가 된 로사는 휘-하고 불어온 바람에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갔다.

얼마 후, 로사가 있던 자리 위로 불꽃처럼 빨간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가시를 곤두세운채, 외롭지만 아름답게, 서럽지만 향기롭게.



<불타는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장미'라고 불렀다.






















이전 04화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