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맞이꽃
모든 게 불편했지만,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곳 인디언 마을 사람들은 태양신을 숭배하며,
마을의 평화는 태양 덕분이라고 믿었다. 누구하나 반문하는 이 없이 태양신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따랐던
사람들인 만큼, 이곳에서는 주로 낮에 활동을 이어갔다.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사냥해온 것들로
요리를 하거나, 나물을 뜯었다.
별처럼 빛나는 까만 눈동자, 찰랑거리는 긴 머리, 웃을 때마다 꽃향기가 번져가는 '로즈'도 그러했다.
열 네살, 또래 여자들처럼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며 하루를 보냈다.
다만 그들과 달랐던 한 가지. 로즈는 낮보다는 밤을, 태양보다는 달을 더 좋아했다.
"아버지, 저 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좀 보세요. 아름답지 않나요?"
"로즈. 목소리를 낮추거라. 우린 태양신을 믿는 부족이야. 달에게 마음을 빼앗겨선 안돼."
"저도 알아요 아버지. 그치만 자꾸 제 마음을 흔들어요. 오늘도 달이 저를 이끌었어요."
"로즈. 큰일날 소리!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선 안돼. 들켜서도 안된다."
걱정하는 아버지와 달리, 로즈는 매일 밤마다 달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가에 몸을 기대어 빗물을 머금은 달을 바라봤고,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이 찾아올 때면, 마을 어귀를 벗어나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곳까지 나가
바다에 내려앉은 달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낮 동안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다가, 밤이 되어 태양만큼 둥글게 차오른 보름달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날이자, 1년에 딱 한번, 여름마다 찾아오는 가장 큰 축제가 있는 날.
'결혼축제' 날이었다.
이 축제에는 몇가지 규율이 있었는데 열다섯살이 된 처녀들은 저마다 꽃단장을 하고 축제에 참가하면,
남자들은 마을에 큰 공을 세운 순서대로, 이를테면 전쟁에서 승리를 하거나 어려운 사냥감을 잡는데
큰 역할을 한 순으로 자신의 마음에 든 처녀에게 청혼을 할 수 있다는 규율이 있었고,
또 하나는, 청혼을 받은 여자는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규율이었다.
"리사 언니, 기분이 어때? 언니도 이제 마우 오빠와 결혼을 하는구나."
"로즈. 쉿! 마우가 내 손을 잡겠다고 약속했지만, 또 모르지. 마우의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고."
"말도 안돼. 마우오빠는 언니 뿐이야.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 오늘 밤. 분명 언니 손을 잡을거야."
"그래준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그런데 언니, 정말 만약. 만약에 말야. 마우오빠가 아닌 다른 남자가 언니에게 청혼한다면 어떻게 할거야?"
"청혼을 받으면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거. 로즈 너도 잘 알잖아. 엄마가 얘기하셨어. 고개를 돌려도 안되고,
손을 뿌리쳐서도 안된다고. 청혼을 거절하게 되면, 마을에서 쫓겨나는 건 물론이고 귀신의 골짜기로
추방될거래. 만일 마우가 아닌 다른 남자가 날 선택한다고 해도, 난 그것 또한 태양신의 뜻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해."
로즈는 리사의 말을 곱씹어봤다. 태양신의 뜻이자, 운명.
정말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그 운명을 거스르면, 태양신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일까.
이미 다 짜여진 운명이라니,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니는 분명 마우오빠와 결혼할 수 있을거야."
로즈는 결혼축제에 참가하는 리사의 손을 꼭 잡으며, 어제 하루종일 만든 꽃화관을 리사의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한낮의 더위가 사라지고 태양이 모습을 감춘 밤이 되었다.
마을의 추장은 머리에 마치 태양과 같은 노란깃털로 장식된 가죽투구를 쓰고 있었고,
그의 오른쪽에는 추장의 첫째아들이 서 있었다.
추장의 지시에 따라 축제에 참가한 처녀총각들은 서로 마주보며 일렬로 섰다.
추장이 호명하는 자는 앞으로 나와 자신의 마음에 든 처녀에게 다가가 청혼을 했다.
세 번째는 마우의 차례였다.
'제발. 마우오빠. 리사언니에게 청혼해!'
로즈는 두 손을 꼭 모으고, 밤하늘을 가득채운 달을 보며 빌었다.
"리사. 내 신부가 되어줘."
마우의 손을 마주잡은 리사는 그날따라 더욱 아름답게 빛이났다.
그 모습을 본 로즈는 1년 뒤, 자신도 리사처럼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축제는 끝이났고, 그 열기도 식어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로즈는 여전히 행복감과 설렘이 가시지 않았다.
달아오른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 보름달을 바라보며 바다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오긴 했지만, 여름밤의 바람은 로즈의 마음을 식혀주기에 부족했다.
로즈는 신고 있던 신을 벗고,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찰박찰박 파도가 칠 때마다 발목을 휘휘 간지럽히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 때였다.
"푸우우-"
커다란 검은 물체가 바다 중간에 떠오르더니, 물을 내뿜는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엄마야!!!"
파도소리와 보름달만 떠 있던 적막한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불쑥 나타나자
로즈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놀라지 말아요!!"
"누...누구세요?"
"크레센트에요."
"크레..센트라면... 추장의 둘째 아들?"
"맞아요."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에요? 멀리 변방에 나가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돌아왔어요. 그런데 날이 너무 더워서 수영을 좀 했는데...
많이 놀랐나요? 이런. 옷이 다 젖었네!"
크레센트는 로즈의 상태를 확인하자 다부진 두 팔로 로즈를 번쩍 안았다.
품에 안긴 로즈는 너무 놀라 입만 벙긋버릴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환한 달빛 아래에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금세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름이..."
"아. 일단 저 좀 내려주세요."
"아! 미안해요."
크레센트의 품에서 풀려난 로즈는 민망한 듯,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수줍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로즈에요. 제 이름."
"로즈...... 아! 맞다! 결혼축제. 혹시 다 끝났나요?"
"풉- 당연하죠. 달을 좀 보세요. 빛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깜깜했던 밤이 물러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제 곧 푸른빛을 띠겠죠. 그럼 빛을 내던 저 달은
하얗게 변할테구요."
"달에 대해서 잘 아나보네요."
"아니요. 그냥 바라본 게 전부에요. 모두가 두려워하는 밤을 지켜주는 존재잖아요.
외롭다고 투정부리지도 않죠. 늘 이 자리에 있어요. 저 달은.
때로는 구름 뒤에 숨기도 하고, 모습을 바꾸기도 하지만, 약속을 어긴 적이 단 한번도 없죠.
올려다보면 항상 있었으니까."
"변방에 나가있을 때, 저도 달을 종종 올려다봤어요. 태양은 바로 볼 수 없어도 달은 볼 수 있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더 다정하고, 따뜻하고, 가까워요."
미소짓는 로즈의 얼굴에 달빛이 내려앉았고, 그 모습에 마음을 뺐긴 크레센트는 자신도 모르게
로즈의 두 뺨을 감쌌다. 로즈는 그의 커다란 손이 달빛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맑은 크레센트의 눈을 바라봤다. 크레센트는 천천히 로즈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그날 이후로 로즈와 크레센트는 밤마다 바다로 향했다.
달빛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로즈. 다음해 결혼축제에서 꼭 너에게 청혼할게. 약속해."
로즈는 달빛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크레센트를 자신보다 더욱 사랑했다.
하루빨리 크레센트와 함께하고 싶었다.
마침내 결혼축제의 날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껏 치장을 마친 로즈는 축제에 참가했고, 남자들과 마주보며 한줄로 섰다.
로즈는 다른 그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크레센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청혼하는 모습만 떠올렸다.
추장의 호명에 따라 크레센트가 앞으로 나왔다.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은 주저함이 없었다.
로즈는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크레센트가 다가오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크레센트는 다른 여자의 손을 잡으며 청혼을 하고 있었다.
로즈의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거렸다. 이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돼. 크레센트. 나와 약속했잖아."
로즈는 크레센트를 바라봤다. 크레센트는 애써 로즈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크레센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로즈는 다른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
"로즈. 내 신부가 되어줘."
로즈는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실망과 분노로 가득찬 로즈는 끝내 해서는 안될 행동까지 하고
말았다. 로즈는 자신의 손을 잡은 그 남자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축제장을 빠져나갔다.
로즈의 아버지는 절망감에 주저앉았고, 곁에서 지켜보던 리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축제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규율을 어겼다는 것에 화가난 추장은 도망간 로즈를 잡아오라 명했고,
얼마 못가 붙잡힌 로즈는 그 즉시 귀신의 골짜기로 추방되고 말았다.
귀신의 골짜기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되었다. 주변에는 사체의 흔적이 남아있었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다가도 밤이 되면 온몸이 얼어붙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갈증이 났지만 마실 물이 없었고, 허기짐이 찾아왔지만 먹을 것도 없었다. 몸에는 힘이 빠져갔고,
눈꺼풀은 자꾸만 무거워졌다. 숨을 쉴 때마다 쌕쌕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즈는 자신의 마음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믿었던 크레센트의 배신이 로즈의 가슴을
찢어놨다. 그러다가도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볼 때면, 크레센트가 그리워졌다.
나지막하면서도 은은한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커다랗고 따뜻한 그의 품과 손이 그리웠다.
달빛처럼 반짝이는 그의 두 눈동자를 보며 사랑한다고 밤새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크레센트는 추장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에게 청혼을 했지만,
그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크레센트 역시 매일밤마다 로즈를 떠올렸고,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며
로즈의 눈동자, 로즈의 목소리, 로즈의 손길을 그리워 했다.
많이 늦었지만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로즈'였다는 걸 깨닫게 된 크레센트는 늦은 밤.
아무도 모르게 귀신의 골짜기로 향했다.
"로즈! 내가 왔어. 당신을 구하러왔어. 정말 미안해. 못난 나를 용서해..."
크레센트는 큰 소리로 로즈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자신의 메아리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게 아니였어...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야. 로즈 당신 뿐이야...!!"
크레센트는 뒤늦게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결혼축제가 있기 하루 전날, 크레센트는 아버지를 만났다.
"크레센트..."
"네. 아버지."
"네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가 로즈... 그 처녀가 맞더냐?"
"네. 아버지. 내일 로즈에게 청혼할 거에요."
"그만두거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로즈는 안된다는 건가요?"
"태양신을 숭배하는 우리 부족에게 달을 사랑하는 여인을 들인다는 건, 큰 불행을 안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더욱이 나는 이 마을의 추장이기도 하지. 그런데 네 짝으로 달을 사랑하는 처녀를
들였다는 걸, 그 누구하나 알기라도 하면..."
"아버지. 그저 달일 뿐이에요. 태양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도 아니잖아요."
"달을 마음에 품은 것 자체가 태양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란다. 크레센트. 나는 네가 우리 마을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우리 마을에 불행을 안기지 말아다오..."
그날 밤,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린 크레센트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두 주먹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가 없었다. 크레센트는 울먹이며 다시 로즈의 이름을 불렀다.
"로즈... 로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크레센트 뿐이었다.
다만 골짜기 아래에는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노란 꽃, 한송이만 피어 있었다.
수줍게, 여리게, 작고 낮게...
<기다림>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달맞이꽃' 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