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뿐입니다

- 무궁화

by Olive

높고 푸른 산과 산 사이에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마을에는 그림을 잘 그리고, 해금을 구슬프게 켜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이마 위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던 여름,

그 여인은 울창한 나무로 우거져, 마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개울가를 찾았다.

꽃신과 신고있던 버선을 조심스럽게 벗은 뒤, 꽃잎처럼 물든 분홍빛 치마 끝을 발목까지 살짝 올렸다.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여인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조록조록 맑게 흐르는 개울가에 발을 담갔다. 이내 발끝으로 시원함이 전해졌고, 풀잎을 머금고 부는 바람은 이마에 맺힌 여인의 땀을

식혀주었다. 더위가 가시자, 이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었던 여인은 집에서부터 챙겨온 붓을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그 바람에 곁에 두었던 꽃신 하나가 퐁당 개울가에 빠지고 말았다.


"어머! 내 꽃신!!!"

당황한 여인은 떠내려가는 꽃신을 주우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꽃신은 더욱 깊은 곳까지 떠내려갔다.


"이를 어째!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귀한 꽃신인데..."

여인은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게 전부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꽃신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 때였다. 첨벙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개울가로 몸을 던졌다. 그 자는 두 손을

휘저으며 여인의 꽃신을 잡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모습에 여인은 더욱 당황했다. 혹여 그 자가 이대로

개울가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빠르게 흐르는 물살에 휩쓸려버리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그 자는 여인의 꽃신을 무사히 주워, 여인이 있는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다.

온몸이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여인의 꽃신도 푹 젖어 있었다.


"받으세요.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여인은 햇살처럼 웃으며 꽃신을 건네는 그 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였다.


"혹여... 앞이 안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눈은 멀었지만, 대신 냄새를 잘 맡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 왜 이리 무모하셨습니까. 대체 이 꽃신이 무어라고...

정말 큰일을 치루실 뻔 했습니다."

"귀한 꽃신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괜찮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이곳은 아는 이가 없을터인데, 어찌 알고 오셨습니까?"

"맑은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지난 겨울, 맑은 냄새를 쫓아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겨울부터 이곳을 아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보다 한발 빠르셨네요."

"어쩐지 실망하는 목소립니다. 제가 이곳을 알고 있어,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닙니다. 말 벗이 생긴 것 같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여인은 여름 내내 이 개울가에서 만났다.

여인은 풍경과 함께 남자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았고,

남자는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여인에 대한 마음을 시로 옮겨 썼다.


"오늘은 무슨 그림을 그렸습니까?"

"개울가에 핀 이름모를 꽃을 그렸습니다."

"또 무엇을 그렸습니까?"

"개울가를 둘러싼 이름모를 나무들을 그렸습니다."

"또 무엇을 그렸습니까?"

"제 앞에 있는 이를 그렸습니다."


남자는 볼 수 없었지만, 여인의 그림은 몇 장을 넘겨보아도 이 남자의 모습 뿐이었다.

남자는 손을 뻗어 여인의 얼굴을 손끝으로 느껴보았다.

손끝은 눈썹에서 눈으로 코로 입술로 내려갔고, 남자의 손은 여인의 입술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여인은 그 남자의 눈이 되어주고 싶었다. 계절의 길목마다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는 세상을 자신의 목소리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 후, 재능도 많고 아름다운 이 여인을 흠모한 자들이 많았지만, 대감집 아들도, 마을 최고의 부잣집 아들도

마다하고 여인이 자신의 남편으로 택한 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남자였다.

그 탓에 여인의 부모는 땡전 한푼 줄 수 없다며, 빈 몸으로 여인을 내쫓았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하나를 구해,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지만,

여인과 남자는 행복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어야 했던 여인은

고작 1년 새에 고왔던 얼굴이 모래알처럼 푸석해졌고, 그림을 그리던 하얀 손은 거칠고 투박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여인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러게 왜 눈 먼 자에게 시집을 갔을꼬. 편한 길 놔두고 어찌 저리 험한 길을 스스로 택한겐지..."

"아직 앞길이 구만리인데, 죽는 날까지 고생길이겠구만!"


마을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여인의 귀에도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인은 남편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다.


한편 아름다운 여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다는 소문은 여기저기 바람처럼 퍼져나갔고, 그 소문은 고을을 다스리는 사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이리도 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가. 내 한번 만나보고 지아비를 지극정성으로

모신 그 여인에게 큰 상을 내려야겠어!"


여인은 사또의 명에 따라, 하던 일을 멈추고 관가로 향했다.

낡고 허름해 보이는 옷차림에 단정하게 빗지 못한 머리. 한눈에 보아도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차림새였다. 사또는 그런 여인이 딱해보였다.


"고개를 들라"

사또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때서야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사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따로없구나.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이냐'

사또는 여인의 외모에 마음을 뺏겨버리고 말았다. 사또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은 건, 여인의 외모만이

아니었다. 공손한 말투와 나긋한 목소리. 단정한 걸음걸이와 현명함까지 갖춘 모습에

사또의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탐이 났다.


'이 여인이 내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꼬.'


이대로 돌려보내기 아쉬웠던 사또는 여인에게 고운 비단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비단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앞을 보지 못하는 네 남편 또한, 내 속속 챙겨주겠노라.

그러니 어떠냐. 내 아내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


여인은 당혹스러웠다.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자신의 아내가 되어줄 수 없냐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탐욕으로 가득찬 사또의 얼굴은 추잡스러웠고, 거북했다.

여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아비가 있는 몸입니다. 저는 그러할 수 없습니다."

"비단으로 부족하단 말이냐? 그럼 저기 저쪽에 쌓여있는 쌀가마니와 진귀한 보물까지 네게 다 주겠노라.

아니!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 말해보거라. 내 다 이뤄줄 것이니. 그러니 부탁이다.

내 아내가 되어다오"

"어찌하여 지아비가 있는 여인을 탐하십니까.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찰싹- 사또는 여인의 뺨을 있는대로 후려쳤다. 여인의 말에 가슴이 아프다가도 괘씸했다.

어르고 달래도 되지 않으니, 화를 내서라도 여인을 갖고 싶었다.

사또는 여인을 삼일밤낮 가두었다. 맥 없이 쓰러진 여인에게 물을 끼얹어 일어서게 했고,

그때마다 물었다.


"내 아내가 되겠느냐?"


여인은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힘이 없었다. 하지만 사또가 물을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단호하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할 수 없습니다. 저를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독한 것! 끝내 내 뜻을 거역하겠다는거냐? 내 것이 되지 않겠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너를 죽여버리겠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사또의 아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지아비는 단 한명 뿐입니다"

"무어라??"


사또는 칼을 뽑아들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몸을 떨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사또는 눈이 뒤집히고 분노가 솟구쳤다.


"고귀한 내 칼에 미련한 네년의 피를 묻히는 것조차 치욕스럽구나. 여봐라! 이 년의 목을 쳐라!!!!!"


사또의 명에 포졸들은 마지못해 여인을 끌고 갔다.


"미안하게 됐수다. 우리도 명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처지라오. 나를 너무 원망마시오."

"그럼 제 마지막 청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저를 우리집 울타리 밑에 묻어주세요.

꼭 약조해주세요."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여인의 목은 단칼에 날아가버렸다.

마지막 부탁대로, 여인의 시신은 집 울타리 밑에 고이 묻어주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고, 울타리 밑에서 작은 꽃나무 한 그루가 올라왔다.

이 꽃나무는 금방 자라 집안 울타리 전체를 감싸안았고,

멀리서보면 마치 꽃나무가 이 집을 보호하듯, 꼭 안아주는 모양새였다.


"이곳에서 그대의 향기가 나는구료. 그대. 거기 있는가..."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는 꽃나무를 어루만졌다.

꽃나무에 핀 꽃은 마냥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죽은 여인의 손길처럼...



<일편단심>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무궁화'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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