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방울꽃
사박사박 풀밟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이 숲에는 '레오나드'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대장간 아들인 그는 총 열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이 숲속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태양처럼 빛나는 멋진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어릴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마이야'였다.
벌을 이용해 꿀을 수확하는 양봉 집의 딸로 '마이야'와 '레오나드'는 서로에게 둘 도 없는 친구였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볼 때마다 흐뭇했다. '레오나드'와 '마이야'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자신들처럼 이 숲에 뿌리내려, 행복을 이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응챠! 흐잇!!! 레오나드. 보고만 있지 말고, 이 사과 좀 따줄래?"
나무 아래에서 콩콩 뛰며 사과를 따려던 마이야는 레오나드에게 도움을 청했다.
토끼처럼 뛰어대는 마이야를 넋놓고 바라보던 레오나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지"
레오나드는 까치발을 들지 않고도, 나무에 달린 빨간 사과를 톡 하며, 손쉽게 땄다.
"자! 받아!"
레오나드가 던진 사과를 받아든 마이야는 반들반들 윤이 나면서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사과를 멍하니
쳐다봤다. 분명 작년만 해도 가장 낮게 열린 사과 하나 못따서 둘이서 나무를 흔들어대고,
목마를 타느니 마느니 아웅다웅 애를 먹었던 것 같은데, 1년 사이에 레오나드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다.
"세상에! 키가 언제 이렇게 큰거야?"
"마이야. 이제 나는 더이상 꼬맹이가 아냐. 내가 이렇게 자랄 동안 마이야 너는 대체 뭘 한거야!
이거봐. 이렇게 무릎을 굽혀야 겨우 너랑 눈을 마주칠 수 있다니까."
"왜.. 왜 이래. 못생긴 얼굴 저리 치워!"
당혹스러운 나머지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이야는 자신도 모르게
레오나드의 턱을 있는 힘껏 밀어제치며, 힘조절에 실패했다.
"아아아... 마이야. 내 턱 잘 붙어있지? 아무래도 확 돌아간 것 같은데..."
"엄살은...!"
민망해진 마이야는 아삭- 사과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때 또 아삭- 소리가 났다. 언제 왔는지 바짝 가까이 다가온 레오나드는 마이야의 볼에 자신의 볼을
찰싹 붙이며 한입 크게 사과를 베어물었다.
아까보다 더 당황한 마이야는 있는 힘껏 두 팔을 뻗어 레오나드의 넓은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 탓에 나란히 사이좋게 한입씩 베어문 사과는 땅에 떨어져 도르르 굴러갔다.
"마이야. 너 오늘 좀 이상해. 그러고보니 볼도 빨간 것 같고. 어디 아픈 거 아냐?"
레오나드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이야의 왼쪽 뺨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저리 좀 가!! 나 안아프니까..."
마이야는 또 한번 레오나드를 밀쳐냈다. 처음에는 눈 한번 맞췄다고 턱을 밀어내고, 사과 좀 뺏어먹었다고
가슴팍을 밀어내더니, 이제는 걱정하는 손길을 차갑게 내리치는 마이야가 레오나드는 서운했다.
"마이야.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어?"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냥..."
"그냥?"
"너 땀냄새 나. 땀냄새가 너무 고약하다고!!!"
마이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집으로 뛰어갔다.
레오나드는 멀어지는 마이야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몸에서 정말 땀냄새가 나는지 킁킁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아봤다.
"풀냄새만 나잖아!! 어디 땀냄새가 난다는거야??!"
괜히 억울해진 레오나드는 허공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너울너울 메아리쳐서, 집으로 달려가는 마이야의 귀에도 들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마이야는 잠시 멈칫했지만, 얼른 집으로 가서 뜨거워진 볼을 찬물로 세수하고 싶었다.
마이야는 집 앞에 도착해서 숨 한번 고르고, 벌컥 문을 열었다.
"마이야! 이제 오는구나!"
"아...안녕하세요!"
집 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와 계셨다. 레오나드의 부모님이었다.
"마이야! 레오나드와 같이 있었던 거 아니니? 왜 혼자왔어?"
마이야의 엄마는 꿀차를 끓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 레오나드는 다른 일이 있다고 해서요."
"그렇구나. 둘이 같이 왔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렇잖아도 너희 두 사람 혼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네? 혼...인이요?"
"뭘 그렇게 놀라니? 너희도 이제 열여섯이야. 당연히 결혼 얘기가 오고갈 때잖니. 더군다가 너희 두 사람
서로 좋아하잖아."
"우리가요???"
"마이야. 네 마음을 잘 들여다봐.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면 들릴게다. 네 진짜 마음의 소리가."
마이야의 두 뺨은 더욱 달아올라, 풍선처럼 부풀다가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도 고장난 것처럼 자꾸만 쿵쿵거렸다.
'레오나드랑 내가 결혼을 한다고? 우리가 부부??'
마이야는 레오나드를 떠올렸다. 키가 훌쩍 커버린 레오나드. 풀냄새가 나는 레오나드의 넓은 품과 커다란 손.
햇살처럼 맑게 웃는 미소, 반짝이는 두 눈. 마이야는 언제부턴가 레오나드를 생각하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숨이 가빠지면서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이게 내 진짜 마음인걸까. 나만 이런 마음이면 어쩌지. 레오나드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기라도 하면...'
그날 밤, 마이야는 밤새 뒤척이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마이야는 다시 숲으로 향했다.
"마이야. 오늘 저녁에 레오나드 가족을 정식으로 초대했단다. 식탁을 장식할 꽃이 필요한데,
숲에 가서 좀 꺾어오겠니?"
"오늘 저녁이요?? 아.... 네. 엄마... 다녀올게요."
레오나드에게 잘보이고 싶었던 만큼, 귀하고 예쁜 꽃을 꺽고 싶었던 마이야는 깊이 더 깊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깊숙하게 들어간 만큼 그곳에는 확실히 귀하게 보이는 꽃들을 볼 수 있었다.
풀벌레 소리, 참새소리를 친구삼아 마이야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꽃들을 꺾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우거진 수풀 너머로 무언가가 아른거렸고, 스륵스륵 기분 나쁜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마이야는 공포에 사려잡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다름 아닌 독사였다. 1년 전, 마을에 나타나 농작물을 모두 망가뜨리고, 마을 사람들을 해치며 괴롭혔던
그 독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말로만 들었던 그 독사를 실제로 보자 오금이 저릴 만큼 크기가 압도적이었다.둘레가 한아름이 넘는 큰 나무만큼 위협적인 크기에 두 눈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마이야는 온 몸이 얼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걸 안 독사는 검은 빛깔의
혀를 날름거리며 마이야의 주위를 애워쌌다. 마이야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한입에 잡아먹힐 분위기였다.
마이야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대로 나는 죽는걸까. 레오나드. 도와줘. 레오나드!!!'
마이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아와 독사의 눈을 찔렀다. 갑자기 눈을 찔린 독사는 땅이 진동하는 것처럼, 귀를 찌르는 소리를 내뱉더니 더 깊은 숲으로 몸을 숨겼다.
"마이야! 괜찮아?"
"레오나드?"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눈 앞에 그토록 보고싶었던 레오나드가 있다는 것에 마이야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마이야는 레오나드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면서 레오나드의 품에 안겼다.
여전히 떨고 있는 마이야를 레오나드는 꼭 안아주었다.
마이야를 업고 마을로 내려온 레오나드는 아버지에게 더 튼튼한 활과 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레오나드. 활과 칼을 만들어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독사요. 우리 마을에 그 독사가 다시 나타났어요. 제가 잡아올게요. 반드시 그 놈의 목숨을 끊어놓겠어요!”
마이야는 걱정스러웠다. 레오나드 혼자서 거대한 독사를 상대할 수 있을까.
레오나드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지만, 만약 잘못되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마이야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레오나드 가지마. 차라리 우리가 이 마을을 떠나자."
"마이야. 그럴 순 없어. 여긴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야. 고향을 이렇게 함부로 버려선 안돼."
"무섭단말야. 네가 못돌아올까봐. 더는 너를 못보게 될까봐."
"마이야. 약속할게. 나 꼭 돌아올게... 내 신부. 내 아내. 사랑하는 마이야. 난 너와 행복하게 살거야.
그래서 싸우러 가는거야.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
레오나드는 마이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며,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주신 활과 화살, 칼을 차고 독사를 처치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걸은 레오나드는 마침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던 독사와 마주하게 됐다.
독사 또한 레오나드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독사에게 레오나드는
칼을 뽑아들며 사정없이 찔러댔다. 쓰러지고, 부서지고, 갈라지는 고통이 전해졌지만
레오나드는 오뚝이처럼 몇번이고 일어나 공격했다. 상냥하게 미소짓는 마이야를 떠올리며,
자신의 신부가 되어 품에 안길 마이야를 생각하며 레오나드는 다시 힘을 냈다.
걸어온 그 시간만큼, 꼬박 사흘 밤낮을 독사와 싸운 레오나드는 입을 쩍 벌린 독사의 목구멍 속으로
칼을 깊숙히 찔러넣은 후에야 악날하고도 질긴 그 독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
독사가 쓰러지고 나자, 레오나드도 온 몸에 힘이 빠져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레오나드! 레오나드!!"
"마이야...."
마이야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꿈이었다.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걸까.
레오나드는 입술을 짓이기며 온 힘을 다해 일어났다. 그리고 걷고 또 걸었다.
우리 집으로. 마이야가 있는 곳으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레오나드!! 흑..... 으흑흑... 레오나드!!!!!"
마이야의 목소리였다. 마이야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레오나드를 끌어 안았다.
마이야의 하얀 드레스 위로도 레오나드의 붉은 피가 번져갔다.
힘없이 툭 떨궈진 레오나드의 손끝에서 붉은 핏방울들이 떨어졌다.
땅 위에 떨어진 핏방울 위로 마이야의 눈물방울과 뒤섞여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땅 위로 이름모를 작고 예쁜 하이얀 꽃이 방울방울 피어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은은한 사과향을 내뿜으면서......
<다시 찾은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은방울꽃' 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