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보이나요?

- 프리지아

by Olive

신의 손길로 빚어내어 더욱 아름다웠던 이 숲에는, '프리지아'라고 하는 요정이 살고 있었다.

맑은 샘이 흐르고, 꽃향기를 싣고 온 바람이 말을 걸어주는 신비로운 숲이었지만, 가끔

프리지아는 다른 세상이 궁금했다. 만물이 소생하고 앞다퉈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 되자,

프리지아는 요정의 날개를 감추고, 며칠 동안 이 숲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여행하기로 했다.

숲을 벗어난 프리지아는 드넓게 펼쳐진 어느 들판을 두 다리로 힘껏 달려보았다.

심장이 콩닥거렸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에 프리지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양 옆으로 펼쳐보았다. 그런데 그 때였다.


"매에에에에에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프리지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복슬복슬 작게 뭉쳐진 동그란 털실이 여기저기 붙어있는 하얀 동물이 자꾸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프리지아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도망을

치거나, 옆으로 피하거나,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당황한 나머지 프리지아는 두 다리가 땅에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 서!! 네가 도망가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고!!!"

털실을 매단 하얀 동물 뒤로,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오는 소년이 보였다.

소년과 하얀동물의 거리는 점점 좁혀졌고, 이내 가뿐하게 따라잡은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단숨에

두 팔로 하얀 동물을 잡을 수 있었다.


"휴. 놓치는 줄 알았네. 제발 말썽 좀 부리지 마. 이 못된 양아!"

"양이라고 하는군요. 이 하얀 동물을."

"네? 설마, 양을 처음 보는 건가요?"


금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깜짝 놀라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프리지아를 올려다봤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프리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뭉클하면서 주륵 눈물이 흘렀다.

소년의 얼굴이 눈부실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에.


"우는 거에요? 아... 많이 놀라셨구나! 안심하세요. 양은 풀만 뜯거든요.

절대 사납지 않아요."


프리지아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이 소년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어디에 사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몇살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프리지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안심하라는 소년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괜찮다는 거죠?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 양들이 또 말썽을 피울 수 있거든요."


프리지아는 멀어져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때 멀리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바람의 요정이 프리지아의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나르키소스에게 반하셨군요."

"나르키소스? 저 소년의 이름이 나르키소스야?"

"그렇답니다. 물의 요정 리리오페의 아들이지요."


프리지아는 그 날 이후로, 몇 번이나 나르키소스와 마주쳤던 들판에 나가보았지만,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였지만, 프리지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르키소스를 향한 마음이 더욱 커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던 프리지아는 물의 요정 리리오페를 찾아가지도

못했고, 그의 소문을 듣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2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지아는 요정들의 대화에서 '나르키소스', 그립고 듣고 싶었던 그 이름을 듣게 됐다. 수줍음이 많았던 프리지아는

적극적으로 그들 대화에 끼지 못하고, 그저 나무 뒤에 숨어 몰래 훔쳐듣기만 했다.


"대체 누가 나르키소스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수많은 요정들이 그의 사랑을 원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면서?"

"그것도 아주 매몰차게 거절했대. 내 몸에 손대지 말라면서 푸른 눈동자로 쏘아보는데,

너무 차갑더라."


숨어 들은 대화를 통해 나르키소스가 16살이 되었다는 것과, 아름답고 잘생긴 외모로 많은

요정들의 마음을 애태우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나르키소스의 소식을 듣게 되자,

프리지아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난 요정들 모두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아직 나에게도 기회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 역시 그들처럼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건 아닐까. 막연한 불안함이 밀려왔다.

그 순간, 프리지아는 반대편 나무 뒤에서 자신처럼 요정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프리지아의 친구이자 숲의 요정, '에코'와 눈이 마주치게 됐다. 프리지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코, 너도 나르키소스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날 밤, 에코는 프리지아를 찾아왔다.


"프리지아. 날 좀 도와줄래? 나르키소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그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는 게 전부야. 나 정말 한심하지?"

"한심하다니. 사랑해서 그런 것을. 그런데 몰래 뒤따라다닌다는 걸, 나르키소스가 알게 되면

기분이 좋을 것 같진 않아."

"맞아. 내 생각에도 그래. 그러니까 프리지아! 날 좀 도와줘."

"에코... 내가 널 도울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역시 프리지아, 넌 나의 영원한 친구야!"


프리지아는 에코에게 자신의 진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 또한 나르키소스를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에코를 영영 잃게 될 것 같았다.

더욱이 프리지아는 그 누구에게도 나르키소스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날이 밝자, 말하기 좋아하는 에코가 만나는 모든 요정들에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프리지아가 꼭 도와준다고 했어. 나르키소스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숲의 요정, 에코인

나 뿐이라고 했어."


이제와서 프리지아도 나르키소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자니, 다른 요정들의 눈치가 보였다.

자신의 사랑을 응원해줄 요정이 단 한명도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친구를 속인 의뭉스러운

요정으로 찍히기 딱 좋았다. 이대로 나르키소스를 향한 사랑을 접어야하나, 다 잊어야 하나,

프리지아는 나르키소스를 마음에서 떠나보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다가도 정말 에코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프리지아는 에코를 도와줄 수가

없게 됐다. 말하기 좋아하는 에코와 대화를 하던 헤라가 바람을 피우던 제우스의 현장을 놓쳐버린 탓에

헤라는 에코에게 누군가의 마지막 말 밖에 따라 할 수 없는 저주를 내려버리고 말았다.


"에코, 정말 저주에 걸린거야?"

"걸린거야...? 걸린거야...?"

"맙소사. 에코... 이를 어쩌면 좋아"


프리지아는 누군가의 마지막 말 밖에 따라할 수 없게 된 에코가 가엾고 안쓰러웠다. 프리지아는 가늘게

떨고 있는 에코의 작은 두 어깨를 감싸며, 꼭 안아주었다. 프리지아와 에코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그 때였다.


"애들아! 거기 있니? 아무도 없어??"

고요했던 숲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돌아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프리지아와 에코가

그토록 원하던 나르키소스였다. 친구들과 함께 놀던 나르키소스가 그만 길을 잃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나르키소스는 여전히 눈부신 외모를 자랑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금빛 머리카락을 한번이라도

쓰다듬을 수만 있다면, 그의 두 뺨을 어루만질 수만 있다면. 에코를 위로해주고 있었지만, 프리지아는

당장이라도 날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프리지아 곁에 있던 에코가 뭔가를 결심한 듯 나르키소스에게 날아가, 그를 힘껏 껴안은 것이다.

당황한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에코를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땅바닥에 내쳐진 에코는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나를 아나요?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다니!!"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그의 말투에서는 거친 표독함이 묻어났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대체 왜 이런 거에요??"

에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어봤자 자신의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다. 에코는 프리지아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눈으로 프리지아를 향해 도와달라 외치고 있었다.

프리지아는 어쩔 줄 몰라했다. 에코를 위해서 나서지도 못했고, 나르키소스 앞에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용기도 없었다. 프리지아는 길게 내려앉은 나무 그늘에 자신의 몸을 더더욱 숨길 뿐이었다.

그 누구도 에코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홀로 남겨진 에코는 외톨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알 리 없는,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에코가 더욱 괘씸하게만 보였다.


"다시는 이러지 마세요. 당신한테 안겨있는 그 잠깐이 내겐 너무 고통이었으니까.

다음에 당신이 나를 또 안는다면, 그 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어요!!!"


나르키소스의 말은 마치 창과 화살처럼 에코의 몸 전체를 찔러댔다.

수치심을 느낀 에코는 눈물을 훔치며 숲속으로 도망쳤다. 뒤늦게 프리지아가 따라가봤지만,

동굴에 몸을 숨긴 에코는 그 이후로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갔다.

끝내 에코의 몸은 점점 사라졌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프리지아는 자신의 친구를 공기처럼 사라지게 만든 나르키소스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 원망 또한, 사랑이었다. 그가 몹시 밉다가도 그리웠고,

그에게 화가 나다가도 그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었다. 미움도 원망도 사랑의 또 다른 감정일 수 있다는 걸

프리지아는 알게 됐다. 그러는 사이 다른 요정들은 나르키소스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에코를 비롯해 다른 요정들의 마음을 짓밟은 거만한 나르키소스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요정들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찾아갔다.


"나르키소스도 심장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끼게 해주세요. 사랑을 거절당하는 그 아픔을 알게 해주세요."


네메시스는 요정들의 말을 듣고, 나르키소스에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저주를 내렸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런 저주가 내려진 줄 꿈에도 몰랐던 나르키소스는 사냥을 하다가, 지난 번 길을 잃었던 숲에 또 오게 됐다. 마침 목이 말랐던 나르키소스는 맑고 깨끗한 샘물에 몸을 숙였다.

물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나타났다. 그건 나르키소스 자신이었다. 그 때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불같이 타오르는 피가 온 몸에 빠르게 퍼져감을 느꼈다.


"당신을 본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물에 비친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름이라도 알려줘요."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그가 자신인 줄도 모르고, 그를 보며 뜨겁게 원하고 갈망했다.

뺨을 어루만지고 싶어 손을 담가보지만, 그 때마다 흐려지는 형상에 나르키소스는 눈물을 흘렸다.

물속에 비친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제발 도망치지 말라며 애원하기도 했다.


"어디도 가지 않을게요. 당신 곁에만 있을게요. 그러니 당신도 나를 떠나지 말아요"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사라질까 두려워,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밤을 지새워가며

물에 비친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 탓에 나르키소스는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잃어갔고,

이런 나르키소스를 바라봐야 하는 프리지아는 심장에 쿵쿵 못질을 하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물에 비친 그는, 나르키소스 당신이에요. 당신을 사랑하면 안돼요. 나를 봐줘요.

나르키소스,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여기 있어요."


프리지아는 늘 속삭일 뿐이었다. 선뜻 나르키소스 앞에 나서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매일 애만 태우면서 그의 주위만 빙빙 맴돌았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뜨기 전, 어둠이 가시고 푸른빛이 숲속에 내려앉은 새벽녘. 나르키소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손으로 담아보고 또 담아보지만, 잡히지 않는 그를 원망하며 울부짖다가 끝내 물속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죽고 말았다. 나르키소스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에 프리지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자신의 온 몸에 생채기를 냈다. 손톱으로 살갗을 긁어내고, 심장을 때려가며 괴로워했지만,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더는 나르키소스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아프고 가슴시린 일이었다.

목소리만 남은 에코는 그런 프리지아를 바라보며 함께 아파했지만, 온 몸이 사라져버린 에코는 프리지아를

안아줄 수도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프리지아는 매일 밤낮으로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결국 제 몸보다

나르키소스를 더 사랑한 프리지아는 나르키소스가 죽고 난 이후에 피어난 '수선화'를 어루만지다가,

나르키소스가 빠진 그 샘물에 자신도 몸을 던졌다. 그 후, 수선화가 핀 그 자리에 바로 뒤따라 노랗고

탐스러운 꽃 하나가 피어났다. 순결하고 고귀하게, 유난히 달콤한 향기를 퍼뜨리면서...



<순진, 천진난만>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프리지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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