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튤립
'애니'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결정할 때마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장 좋아하는 색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면
애니는 고개만 숙인 채 웅얼거렸다. 엄마는 이런 '애니'를 볼 때마다 속상했다.
"애니, 엄마는 네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바로바로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어.
갈피를 못 잡아 방황하지 말고, 확실하게 네 뜻을 전해야 한단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빼앗길지도 몰라."
"누구에게 빼앗겨요?"
"너의 것을 욕심내는 이에게 빼앗기겠지?"
"제 것이요? 제 것 중에 욕심나는 게 있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일생일대의 행운일 수도 있고, 놓쳐선 안될 사랑일 수도 있어. 어쨌든 너에게 찾아온 기회를
네 스스로 쫓아내지는 말란 소리야."
나이가 어렸던 애니는 당시 엄마가 했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애니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어여쁜 아가씨로 자랐고, 어느덧 혼기가 차서 결혼을 할 때가 됐다.
애니는 매일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남자가 찾아올까, 어떤 말을 듣게 될까.
하루하루 궁금해하며, 청혼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애니는 아침마다 곱게 단장을 하며, 자신의 심장을 뛰게할 남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한 남자가 찾아왔다. 애니는 2층 창가에서 닫힌 커튼 틈 사이로 슬쩍 그 남자를 내려다봤다.
"어머니! 지금 우리집을 찾아온 남자가, 이 나라 황태자가 맞나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구나. 애니, 어서 앉아있거라. 황태자를 맞이해야지."
애니는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깻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 쉬었다.
발그레진 두 볼은 애니의 마음을 대신하는 듯 보였다.
"애니, 그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소. 그대가 나와 결혼한다면, 이 왕관을 그대의
머리에 씌워주겠소. 그러니 그대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라오."
황태자의 외모는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깊고 그윽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끊임없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애니는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순간 치아까지
드러낸 것 같아, 힐끔 창가에 서 있는 엄마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엄마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안심을 한 애니는 헛기침을 하더니, 무릎을 살짝 굽혔다펴며,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황태자를 돌려보냈다.
"그대의 답변만을 기다리겠소."
그렇게 황태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갔다. 이어 또 한사람이 애니를 찾아왔다.
그는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자로, 나라의 크고 작은 전쟁을 매번 승리로 이끈 황실 기사였다.
그 또한 매력적인 남자였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 팔에는 전쟁이 남긴 훈장과도 같은 상처가
곳곳에 보였고, 그것 자체가 이 남자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첫눈에 보기에는 거칠게 느껴지는 그의
삶이었지만, 웃을 때는 그 누구보다 순순하고 해맑았다. 그런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애니에게 청혼을 했다.
"애니, 그대를 만나기 위해 나는 여러번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오.
만약 나와 결혼한다면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이 검을 그대에게 바치겠소."
애니의 심장은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애니는 단박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황실기사를 돌려보냈다.
마지막으로 애니는 찾은 남자는,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유한 상인의 첫째 아들이었다.
자신의 배를 이용해, 세계여행을 즐긴다는 그는 듣던대로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그는 각 나라의 언어로 짤막하게 인사하며 애니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이 찰나를 놓지지 않고, 얼른 무릎을 꿇어 애니에게 청혼했다.
"애니, 그대를 만나기 위해 나는 그토록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헤맸는지도 모르겠소.
만약 그대가 나와 결혼한다면, 우리집에 있는 금괴를 모두 그대에게 주리다."
애니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궁금했다. 그에게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애니는 이번에도 공손하게 인사한 뒤, 부유한 상인의 첫째아들도 돌려보냈다.
애니에게 청혼을 한 남자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자, 애니보다 더 흥분한 건 엄마쪽이었다.
"세상에, 애니! 엄마는 네가 누구와 결혼한다고 해도 말릴 이유가 없겠구나. 모두 너의 짝으로 완벽하니
말이다. 이 엄마는 기쁘구나. 우리 딸. 한번 안아보자."
"어머니.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나라의 황태자와, 황실 기사와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 모두 저에게
청혼을 하다니요."
"애니, 네 마음이 궁금하구나. 어서 말해다오."
"음... 잘 모르겠어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애니는 밤새 고민했다. 먼저 황태자부터 떠올렸다. 애니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황태자가 직접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고, 사람들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올리는 결혼식.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근사한 삶의 연속일 것 같았다.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그 행복의 빛이 선명해서,
애니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곧바로 황실기사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황실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들의 길게 내뻗은 검 사이로 행진하는 신랑신부의 모습.
무엇보다 그가 곁에 있노라면, 마냥 든든할 것 같았다. 마음에 걱정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넓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푸념을 늘어놓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애니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혹여 누가 들을까 싶어, 곧바로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이 때 애니의 머리 위로 파도를 가르며 횡단하는 거대한 배 한척이 그려졌다.
마지막으로 애니에게 청혼을 건넨 그 사람. 애니는 그가 가진 부유함보다도 그의 이야기가 더 짜릿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저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들을수록 신기하고 신비로웠다.
매일 밤마다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고, 그의 세계탐험기를 자장가처럼 듣고 싶었다. 분명 우리의 결혼식은
다른 나라에서 보고 듣고 느낀, 새로운 문화와 방식 속에서 독특하게 치뤄질 것 같았다. 특별하고 남다름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달콤한 상상은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난 누구의 청혼을 받아야 할까."
애니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엄마는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애니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애니. 마음에 결정은 내렸니?"
"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저는 세 사람 모두 좋아요."
"애니. 그래도 좀 더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니!"
"모르겠어요. 모두에게 마음이 가요. 황태자의 손을 잡자니, 황실 기사와 상인의 아들이 마음에 걸리고,
황실 기사의 손을 잡자니, 황태자와 상인 아들의 얼굴이 아른거려요.
어머니.. 저는 세 사람 모두를 사랑해요. 사랑하게 됐어요..."
두 사람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알지 못했다.
문밖에 서 있던 하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으리라고는.
입이 가벼웠던 하녀는,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 역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알렸다.
소문이라는 게 그랬다. 진실은 손톱 만큼의 작은 크기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보면
진실 외의 다른 불순물이 더해져, 오해라는 거대한 늪을 만들어냈다. 그게 소문이 가진 힘이었다.
"애니 말이에요. 하루는 황태자와 놀아나고, 또 하루는 황실기사와 놀아나고, 얼마 전에는 상인의 아들과
밤새 놀아났다고 하더라구요?"
"애니에게 청혼한 세 사람 말고, 이미 남자가 있었다던데?"
"그게 정말이에요?"
"청혼을 받은지 일주일이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결정을 못했다는 게 말이 돼? 다른 남자가 있는게지!"
"세상에... 그러고선, 세 남자와 놀아났단 말이에요? 쯧쯧쯧."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봤고,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었다. 그렇게 뭉쳐진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황태자와 황실기사, 상인의 아들 귀에도 들어가게 됐다. 그 소문은 곧 애니의 실체처럼 느껴졌다.
순수하고 티없이 맑게 보였던 애니는 사실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쩐지 애니에게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세 남자는
이를 갈며, 분노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몰랐던 것 같군. 당신같은 여자에게 이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한 말은 내 평생의 후회로
남을 것이오."
"황태자 전하. 오해십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청혼을 받고 너무 기뻐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허! 어느 누구를 골라야 나에게 더 이득일까 따져본 것은 아니오?"
"아닙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를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다만..."
"다만?"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는 만큼, 황실 기사님도 사랑합니다."
"뭐라 했소? 나만큼 황실기사도 사랑한다?"
"상인의 아들 또한 제 마음에 있습니다. 세 분 모두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한없이 부족한 제가 세 분
모두에게 청혼을 받다니, 동화같은 일이 제게 일어난 것이지요."
"허면, 세 사람과 모두 결혼을 하겠다는 말이오?"
"그리할 순 없지요. 그러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참으로 무례한 사람이오. 남의 마음은 물론, 자신의 마음 조차 들여다보지 못하는 미련한 사람이군.
사랑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사랑하는 법. 사랑받는 법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니...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대를 내 나라에서 추방하려 했으나, 가엾은 그대가 평생을 어찌살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가지마세요. 황태자 전하. 저를 떠나지 마세요."
애니는 필사적으로 황태자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쳐내며,
다시는 애니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황태자의 거절은 신사적이었다. 다음에 찾아온 황실기사는
분노에 차 그녀를 노려보며, 목끝까지 검을 겨눴다.
"내 생애 이렇게 수치스러운 적은 처음이군.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를 당신에게 바치겠다고 한 말은
당장 잊어주시오. 그 말을 뱉은 내 입을 찢어놓고 싶을 정도니까."
"기사님. 들리는 소문은 모두 오해입니다. 저는 기사님을 사랑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청혼한 다른 이들도 사랑한다는 게 문제 아니겠소. 그대는 욕심이 과한 여자로군.
언젠가 그대가 부풀린 그 욕심이 독이 되고 덫이 되는 날이 올것이오!"
황실기사는 풀썩 주저앉아 우는 애니를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이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애니를 보자,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그대는 황태자의 왕관도, 황실기사의 검도 나의 금괴도 탐이 났던 모양이군.
사랑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나를 농락하다니. 그대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매일매일 그대를 저주할 것이오."
일주일 전만 해도 애니는 세 사람에게 청혼을 받고,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절망과 고통만이 그녀를 애워싸고 있었다.
한기를 느낀 애니는 어깨를 감싸쥐며 흐느꼈다. 그 누구도 애니를 안아주지도 위로하지도 못했다.
그 날 이후로 애니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물 한모금 넘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살이 빠져 커다란 두 눈은 툭 불거져 나왔고, 장밋빛 입술은 거무티티하게 바래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애니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검푸른 악령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끊임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겨우 악령에게서 벗어나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돌을 던졌고,
침을 뱉기도 했다.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다 해도, 현실 역시 악몽과 다름없었다.
"미안합니다. 당신들을 모두 사랑해서, 미안합니다..."
이 말을 끝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애니는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긴긴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침내 애니는 평온을 되찾았다. 죽음을 맞고 나서야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애니의 장례식을 마치 결혼식처럼 최대한 화려하게 치러주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결혼식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얼마 후, 애니가 묻힌 자리에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꽃봉오리는 황태자가 바치려 했던 왕관을 닮았고, 곧게 뻗은 잎사귀는 기사의 검을 닮았으며,
뿌리는 상인 아들의 금괴를 닮은 모습으로.
<헛된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튤립'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