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피너스(루핀)
한적하고 고요한 어느 시골 마을, 그 고즈넉함이 좋아서 바람마저 머물다 가는 이곳에 '폴'이라고 하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작은 우체국에서 마을 사람들의 편지와 소포를 전해주었던 그는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폴, 방금 막 짜낸 우유에요. 한번 드셔보시겠어요?"
"아. 괜찮습니다. 바빠서요."
폴은 냉담한 표정으로 건조하게 말했다.
"그럼 가져가서 마셔요."
고생하는 폴을 챙겨주고 싶었던 루시 아주머니는 우유 두 병을 챙겨 자전거에 올라타려는 폴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폴은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낚아챈 루시 아주머니의 손을
탁-하고 무심하게 뿌리쳤다.
"괜찮습니다."
폴은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내달렸다. 우체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화장실로 가서
짜증스럽게 손과 손목을 몇 번이나 씻어냈다. 마을 사람들은 폴을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과할 만큼 결벽증을 앓고 있었다. 처음부터 폴이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폴이 15살이던 그 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폴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붉은 액체를 보고,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처참하게 살해당한 부모의 모습을 보게 됐다.
강도의 소행이었다. 평화로웠던 그의 인생이 점점 꺼져가는 늪처럼 변해버린 건, 그 사건 이후부터였다.
그날 이후로 폴은 사람들에게 벽을 치며 살았고, 마음의 담장을 높이 쌓아올려 그 누구와도 섞이려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루함과 반복의 연속이었다. 무미건조한 인생이었지만, 그런 폴에게도 유일한 즐거움이 딱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나비' 채집이었다.
우연히 자신의 손등에 내려앉은 나비를 보고, 그 영롱함과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폴은 그 때부터 나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나풀거리며 날아다니는 고운 빛깔의 나비들을 보고 있으면,
하루의 피로가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에 기대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폴은
생전 처음보는 아름다운 빛깔의 나비를 보게 됐다.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두 날개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몸짓에 폴은 넋을 잃고 바라봤다. 폴은 벌떡 일어나 그 나비를 잡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나비는 다른 나비와 달리 쉽게 잡히질 않았다. 폴의 가방에는 배달해야할 편지들이 잔뜩 쌓여있었지만,
폴은 오직 그 나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나비를 잡으려고 가시덩굴에 손목이 긁히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지기도 했다. 어느덧 해는 산 아래로 모습을 감추면서 파랗던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온 몸을 날린 폴은,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그 나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폴은 고개까지 뒤로 젖혀가며, 모처럼 크게 웃었다. 아름다운 나비를 잡았다는 사실이 왠지모르게 뿌듯하고
벅찼다. 비록 편지를 배달하지 못해 있는대로 혼이 났지만, 폴은 투명한 유리에 담긴 나비를 바라보며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집에 돌아온 폴은 손을 깨끗하게 씻고, 힘겹게 잡은 나비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방에
풀어줬다. 그러자 그 나비는 몇 번 날아오르더니, 갑자기 사람의 형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광경에 폴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자신이 잡아온 나비가 실은 온 몸이 태양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여자였다는 걸 알게
됐다. 폴은 그녀를 보자,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 울렁거리면서도 간지러운 기분.
그녀를 어루만지고 싶고, 안아보고 싶은 기분. 계속 바라보고, 곁에 두고 싶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그녀는 슬픈 눈으로 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보내주세요.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폴을 더욱 자극했다. 폴은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아졌다. 어떻게든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폴은 무슨 말이든 해야했다.
"내일 아침에요. 오늘은 밤이 늦었어요. 내일 당신을 보내줄게요. 약속해요."
폴의 말만 믿고 그녀는 폴의 곁에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폴은 그녀를 이대로 놓아주기가 싫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분홍빛으로 물든 뺨을 어루만져 보았다. 폴은 그녀가 내것이 되었으면 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가던 폴은 그녀가 잠든 사이, 어디도 날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은 뒤, 한줌의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실에 가둬버리고 말았다. 폴은 그녀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이마에, 눈에, 볼에,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때마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흐느껴 울었다.
"이 스프 좀 먹어봐요. 당신을 위해 요리했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폴. 제발 나를 보내주세요."
"왜 자꾸 나를 떠나려해요. 내가 잘해주고 있잖아요. 당신만 바라볼게요."
"미안해요. 폴.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요."
"아니! 당신은 나와 함께해야 해요. 이 세상에서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요. 나와 있어야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폴. 이건 사랑이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그저 갖고 싶을 뿐이에요. 소유하고 싶을 뿐이라고요."
"당신은 여전히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네요. 벌을 줘야겠어요."
폴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녀를 많이 사랑했지만, 자꾸 자신에게서 도망치려는 그녀를 폴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때마다 폴은 하루종일 어둠 속에 그녀를 가두기도 하고, 어느 날은
마실 물도 먹을 것도 그 무엇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폴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점점 그녀에게 미쳐가고 있었다. 우체국에서 편지를 배달하는 일마저 그만두고, 하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그녀만 바라봤다.
그럴수록 그녀는 시들어갔고, 몸 전체에서 뿜어내던 빛은 점점 희미해지며, 사그라들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줄게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당신을 이 지하실에서 꺼내줄게요.
자. 말해봐요. 날 사랑하나요?"
"나는... 당신을..."
그녀는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많이 지쳐있었다. 맑고 청아했던 목소리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입술은 다 갈라져 터져있었고, 분홍빛의 뺨대신, 양볼이 움푹패여 볼썽 사납게 추한 모습이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가루가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폴은 그녀의 입술만 바라봤다.
"계속 말해봐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사랑...하지 않아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는 당신은 사랑하지 않을 거에요."
두 눈을 부릅뜨고 원망의 눈길로 쏘아보는 그녀의 말에 폴은 목끝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화가 치민 폴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왼쪽 뺨을 때린 걸로도 모자라, 오른쪽 뺨을 때렸고, 화가 풀릴 때까지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진 그녀의 고개는 아까부터 자꾸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폴은 그 모습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가 숨을 쉬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공은 빛을 잃고 텅 비어있었다. 너무 놀란 폴은 잡고
있던 그녀의 머리채를 놓아버렸다. 그녀의 고개는 또 다시 힘없이 툭 바닥을 향해 떨궈졌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폴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은 한순간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렸고, 그녀가 있던 곳에는 나비 날개 모양의 꽃 한송이가 놓여있었다.
허망하고, 쓸쓸하게. 하지만 찬란하고, 눈부시게.
<탐욕>이라는 뜻을 가진 꽃.
훗날, 사람들은 그 꽃을 '루피너스(루핀)'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