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향한 마음이 나를 다독이는 순간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일’을 한다. 하지만 그 선의의 출발점이 꼭 타인을 위한 것일까? 나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앵벌이 아이들에게 돈을 주는 건 그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보고 있는 내 마음이 불편해서 주는 거야.' 그 말의 뜻을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다. 나쁜 어른들이 뒤에서 돈을 가져가니 주면 안 된다는 말보다, 그 아이가 굶을 수도 있다는 어머니의 말이 더 마음에 남았다.
이제야 안다. 어머님이 말씀 하신 건 시혜나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걸. 우리가 하는 많은 선행은 실은 나 자신의 불편함을 덜기 위한 행위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 내 마음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내민다. 그 손길은 타인을 살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살린다.
오늘 저녁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지인들이 식사 자리에서 내게 맥주 한 잔을 권했다. 두어 번 정중히 거절했지만 한 분은 끝까지 권하며 잔을 내밀었다. 그때 문득 내일 새벽 절에 들러 반년 동안 재수하느라 애쓴 아들의 시험을 위해 절을 하기로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말했다.
“내일 절에 갈 예정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지인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공부는 아들이 한 거잖아요. 절한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 답했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안 마시는 게 좋겠어요.”
그 말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쩌면 절에 가는 일도, 아이에게 향하는 기도도, 모두 내 마음을 다독이는 일일 것이다.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불안과 바람을 정리하고 평정을 찾는 과정.
결국, 나는 남을 위해 행동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나 자신이 있다. 어머님의 말씀처럼, 나의 평안을 위해 선을 행하고, 절을 하고, 때로는 술 한 잔을 거절한다. 그것이 인간의 솔직한 마음의 구조이고, 어쩌면 그게 진짜 ‘수행’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