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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호 5시간전

프랑스 식민시대의 시대상과 통치

베트남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프랑스 식민지 시대(1887-1954)는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경제, 사회, 정치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베트남의 전통적 삶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베트남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시작과 통치 방식, 경제적 약탈, 사회적 변화, 그리고 베트남 독립운동의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시작과 배경

 프랑스는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경제적 이익 추구를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858년 프랑스는 남부의 다낭(Da Nang)을 공격하면서 군사개입을 시작하며,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1887년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해서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 연방을 형성하였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2. 프랑스의 통치 방식과 구조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다른 통치 방식을 실시하였는데, 이 또한 역사상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남부인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총독이 모든 행정과 법률을 주관하며, 베트남인들의 정치적 참여를 철저히 제한하는 직접 통치 방식을 취했다. 중부인 안남은 명목상으로 응우옌 왕조의 황제가 통치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통제를 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군사적 중요성이 높은 지역인 북부의 통킹은 프랑스 군부가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 이처럼 프랑스는 지역별로 다른 통치 방식을 채택하며, 효율적으로 자원을 수탈하고 식민 통치를 강화했던 것이다.


 3. 경제적 약탈

 프랑스의 식민 통치는 경제적 착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프랑스는 대규모 쌀 생산을 위해 메콩강 삼각주와 홍강 삼각주 지역에 광대한 농장을 개발했다. 대부분의 농장은 프랑스 자본가와 지주들에게 할당되었으며, 베트남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프랑스는 메콩 삼각주에서 쌀을 대량 생산해 유럽으로 수출하였지만 수익은 모두 프랑스로 돌아가고, 베트남 농민들의 생존은 위협당했다. 또한 광산 개발과 고무 농장 운영을 통해 석탄, 주석, 금 등을 대량 수출하며 천연자원을 수탈했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과 열악한 조건에 시달렸으며, 임금은 매우 낮았다.

 한편으로 프랑스는 국민들에 고액의 세금을 부과해 베트남 농민과 소상공인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쌀, 염분, 술 등에 대한 세금은 가혹했다.


 4. 사회적 변화와 억압

 프랑스의 통치는 경제적 착취뿐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통제도 포함된다.  

 우선 베트남 전통 교육(한문 교육)을 폐지하고 프랑스식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베트남인은 프랑스어를 사용해야 했고, 고등 교육은 소수 엘리트 계층에만 허용되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어는 상류층과 지배층의 언어가 되었고, 일반 대중은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다.

 베트남의 전통문화와 풍습은 프랑스 문명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하며, 유럽식 생활 방식을 강요당했으며, 전통적인 종교와 관습이 경시되었고, 서양식 교회와 문화가 확산되었다.

 비밀경찰을 운영하면서,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여, 베트남 민족운동의 중심인물들은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대표적으로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와 호찌민(HồChí Minh)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5. 도시화와 현대화

 프랑스는 도시와 교통 인프라를 현대화하며 베트남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거점으로 개발했다. 이때 하노이, 사이공(호찌민시) 등 주요 도시가 프랑스식으로 설계되었다. 하노이에는 오페라 하우스, 프랑스 대성당 같은 건축물이 세워졌고, 사이공에는 호화로운 거리와 빌라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철도와 항만 시설을 개발해 베트남에서 프랑스로의 물자 운송을 원활하게 하기도 했는데, 하노이-사이공 간 철도(Reunification Express)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6. 베트남 독립운동의 전개

 이러한 식민 통치의 억압은 베트남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은 서구적 사고를 접하면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며 새로운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이 형성되었다.

 대중운동 또한 확산하기 시작했다. 농민과 노동자 계층도 독립운동에 동참하며 저항의 열기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특히 1945년, 베트남 8월 혁명은 프랑스 식민 통치의 종말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게 베트남을 빼앗겼다가 전후 다시 통치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며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에 돌입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쟁취한다.  


 결론적으로, 프랑스 식민지 시대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경제적 착취와 민족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온 억압적인 시기였지만, 동시에 근대화와 민족주의 운동의 기초를 제공한 복합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베트남의 오늘날 도시 풍경과 문화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프랑스의 흔적은 애증의 역사를 떠올리게 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이러한 약탈과 억압의 식민통치를 당하면서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지금 프랑스의 흔적이 애증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라 왔고 베트남 국민들의 對프랑스 투쟁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글에서는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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