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고양이를 맞이하는 방법: 아주 사적인 합사의 역사
어렸을 적에 나는 동생을 낳지 말아달라고 무척이나 조르는 아이였다.
협박 아닌 협박 같은 우격다짐을 하기도 했다. 동생이 있으면 집이 더러워질 것이다, 내 물건을 함부로 쓸 것이다, 그러니 동생이 생긴다면 나는 무지막지하게 괴롭힐지도 모른다, 등등. 딱히 부모님이 나에게 소홀했던 적은 없었는데, 오롯이 혼자 받는 관심이 얼마나 좋았던지, 어린 나는 말을 배우고 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동생이 생기면 안 된다고 떠들어댔다. 아마 그 나이에 종교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아마 치성 드리듯 물이라도 떠놓고 정성껏 동생 반대 기도를 올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동생을 갖고 싶어하는 아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린 내 주변에는 이미 형제가 있거나, 형제가 있든 없든 동생을 갖고 싶다고 부모를 조르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겉으로는 어른들에게 의젓하다느니, 철이 일찍 들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던 나지만, 어쩐지 동생이 제발 생기지 말아라, 하고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애정을 아무리 쏟아도 부족한 밑 빠진 항아리가 된 느낌이었다.
그 덕분인지 아닌지, 어쨌든 나는 외동으로 자라 부모의 유일한 자식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내가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뺏기는 기분, 부모의 애정을 도둑질 해 가는 존재에 대한 거부, 동생만은 절대 안 돼, 라는 그 감정의 배신. 그런 것들을 누군가에게 경험하게 만든 건, 내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것도 나의 고양이들에게, 게다가 두 번씩이나.
나의 첫 번째 고양이와 두 번째 고양이는 여섯 살 터울이, 두 번째 고양이와 세 번째 고양이는 아홉 살 터울이 난다. 모두 아기 고양이였을 때부터 나와 함께 살았으니, 첫 번째 고양이는 두 번째 고양이를, 두 번째 고양이는 세 번째 고양이를 동생으로 들인 셈이다. 게다가 한 번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지만, 한 번은 완벽히 계획을 짜기까지 했으니, 이건 범죄나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가히 한 번은 우발적, 한 번은 계획적인 범죄.
첫 번째 고양이가 여섯 살 때 온 두 번째 고양이는 업둥이였다.
어미를 사고로 잃고 홀로 있던 아주 작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기 고양이를 친구는 나에게 맡겼다. 단순히 주변에 고양이를 반려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였다고 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황당해 한 건 첫 번째 고양이었다. 그는 소심할 정도로 순하고 점잖은 고양이었는데도, 먼 발치에서 내 품에 안긴 작은 고양이를 보고 그답지 않게 큰 소리로 야옹, 하고 울었다. 본능적으로 그가 이 상황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 때 아기였던 두 번째 고양이는 너무 작았고, 또 자기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성묘용 사료를 와구와구 먹어대는 모습에, 나는 막 그 고양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차였다.
걱정과는 달리, 한 달 정도 격리 끝에 첫 번째 고양이는 두 번째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하며 작은 고양이의 머리 위로 앞발을 올렸다 내렸다 하던 첫 번째 고양이는, 두 번째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집안을 보여주기도 하고, 우다다를 함께 하기도 하며 뛰놀았다. 장난감도 많이 양보해 주고, 어쩌다 싸우게 되어도 져 주기도 했다. 그 덕에 두 번째 고양이도 그를 매우 따랐고, 첫 번째 고양이도 눈에 띄게 활발해져서, 나는 둘을 키우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문제는 첫 번째 고양이가 고양이별로 떠난 후였다.
아픈 첫 번째 고양이 옆을 내내 지키던 두 번째 고양이는 꽤나 쓸쓸해 보였고, 첫 번째 고양이의 부재로 인한 슬픔만큼이나 나는 홀로 남은 두 번째 고양이를 몹시 걱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두 번째 고양이는, 예상과 달리 세 번째 고양이를 몹시 달가워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고양이는 먼 발치에서 본 아기 고양이를 보고도 야옹, 하고 울지는 않았다. 다만 하루 온종일 나조차도 처음 보는 언짢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 번째 고양이는 명랑했고, 작은 몸으로 격리를 위해 쳐 둔 철망까지 뛰어 넘으며 두 번째 고양이에게 먼저 놀자고 조르기까지 해서 더욱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다. 그제서야 나는 두 번째 고양이에게 동생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먼저 떠난 첫 번째 고양이지, 또 다른 고양이, 그러니까 동생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상태는 반 년 가까이나 지속됐다. 두 번째 고양이에게 동생을 데려다 준 여파는 나에게도 엄청나서, 나는 어떤 날은 두 번째 고양이에게 미안해 몸둘 바를 몰랐고, 또 다른 날은 아무 잘못 없이 불청객이 된 세 번째 고양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세 번째 고양이와 놀아 주는 나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두 번째 고양이를 보며, 나는 그제서야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동생은 절대로 안 돼, 나는 아주 질투심이 많으니까, 동생은 받아 줄 수 없어. 내가 더 사랑받을 거거든. 그러고 보니 첫 번째 고양이가 아프기 시작한 후로, 나답지 않게 두 번째 고양이를 너무 혼자 자주 내버려 뒀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행히 반 년이 채 되지 않아 둘 사이는 극적으로 괜찮다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이가 됐다.
첫 번째는 내 노력이 어느정도 통한 덕이었다. 어리광쟁이인 두 번째 고양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 주는 대신, 놀이 시간만큼은 에너지 넘치는 세 번째 고양이에게 집중해 주었다. 두 번째로 세 번째 고양이의 노력도 빛을 발했다. 붙임성이 좋은 성격 덕에 몇 번이고 두 번째 고양이가 싫은 내색을 해도 어리광을 부리고 그녀를 따랐다. 장난기를 못 참은 나머지 종종 저보다 덩치가 작아진 두 번째 고양이를 덮치는 것을 빼고는, 꽤나 거리를 좁힐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고양이 또한 많은 노력을 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세심하고 새침데기인 그녀의 성격을 감안하건대, 세 번째 고양이를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인 갈등이 있었을까. 동생을 바라지 않던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 노력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동생이 생겼을 때 배우자에게 첩이 생기는 정도의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대학생 때 우연히 전공 강의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반가웠고 또 내심 안도했다. 내가 그렇게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뺏기는 기분, 부모의 애정을 도둑질 해 가는 존재의 출현에 대한 거부, 그 모두를 절실히 표현했던 나의 방어적인 태도를 지지해 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고양이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샘이 많으면서도 놀랍도록 관대한지 나는 깨닫게 되었다. 부모의 또 다른 자식으로 인한 질투심에서 나는 나를 지켰지만, 관용이라는 성장의 기회는 영영 갖추지 못하게 된 셈이다.
그렇지만 고양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고양이를 데려다 주면서 나 또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고르게 사랑을 주고, 성격에 맞춰 반응해 주고, 그들의 사이를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애정의 분배에 대한 성장. 나는 여전히 동생이 생긴다면 거절하고 싶은 철없는 성인이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이기적이게도 고양이들에게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해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