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현명한 선생님이다
방금 단체전에 낼 그림을 끝냈다. 요즘은 왜 이렇게 실력이 부족한지 모르겠다. 눈은 높아서 이상은 하늘인데, 실력은 언덕빼기다. 몇 번의 반복으로 이제는 안다. 실력이란건 계단식으로 오르는 거니까, 아 진짜 미치겠다.. 라는 고민이 끝나면 훅 훅 늘어있을거라는걸. 근데 진짜 직면해서 미칠만큼 잘 고민해야, 그 미치겠는 고민이 끝난다는 것도.
예전엔 회의가 들 때마다 내가 전공을 안해서 그런가.. 싶었다. 졸업장이라는 종이 한 장이 뭐라고 그렇게 주눅이 들었다. 왠지 기초부터 못배운거 같고, 큰 흐름을 놓치고 있는 것 같고. 이제는 안다. 전공이고 아니고 간에 캔버스에 붓대고 있는 시간이 기초이자 큰 흐름인 것을. 전공을 안해서 4년 걸릴게 9년이 걸리지만, 8년차인 요즘은 사실 그게 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실제로 잘 그리는지 아닌지도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가 처음부터 잘 나갔다면 전시고 공모전이고 오히려 귀찮았을거다. 그런 기회가 전혀 없을때가 있었기에 소중함을 안다. 그래서 난 여전히, 돈을 벌긴 커녕 오히려 시원하게 써야하는 급한 전시에도 쉽게 응한다. 지금 전시일정이 내게 무리가 되던 아니던 간에, 그런 기회의 존재자체가 고마우니까. 없이 시작하는 것과 가지고 시작하는건 굉장히 다르다는걸 안다. 그리고 없이 시작하는게 정말 이롭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미술이 돈이 되니 어쩌니 떠들어대도, 실제로 100원도 못번대도, 나는 그냥 죽을때까지 한다. 하고싶은게 있는거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그걸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는걸 안다.
아가를 키우면서 수많은 애기엄마들을 만난다. 경제가 심란한 요즘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청약을 넣고 적금을 넣어준다. 그리고 또 뭘 더 해줄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한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갈 생각이다. 여윳돈이 있어도, 내가 흔쾌하게 쓰고 아가는 왠만하면 스스로 살게 할 생각이다. 10이 필요하면 잘쳐서 8정도 제공할 생각이다. 필요한 2를 얻기 위해서 0부터 10까지 상상하고, 도전하고, 깨지고, 울고, 다시 시작하고.. 이 반복의 시간의 힘을 겪었기에 잘 안다. 그 귀한 경험을 아가가 충분히 겪게 해볼 심산이다. 너무 좋은 세팅값은 동시에 너무 좋은걸 놓치게 한다.
이제는 안다. 문제가 있으면 뭐든 직면이 제일 빠르다는걸. 하기로 했으면 불안해하지 않고 미래의 나를 믿고 힘차게 가야만 한다는 걸. 괜히 꽁해지면 감정에 솔직해지는게, 의심스러우면 이거저거 찾아보면서 불안해하는 것보다 바로 전문가를 찾아가 시간과 돈을 쓰는게 가장 가성비가 좋다는 걸. 수많은 회피와 불안과 생각을 거쳐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바닥을 마주하는거, 부족한거, 능력없는거.. 이 모든거엔 가르침이 있었다. 어쩔땐 노력을 가르치고 어쩔땐 감사를 가르친다. 그런 나를 직면하고 인정하면서 모든 해결이 시작된다는 것도. 그래서 나는 내 생에 오는 모든 결핍을 사랑한다. 어쨌든 결국은 해결해나갈 나를 믿기에.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거나, 혹은 해결되고 있는 중이다.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다. 단점보다 장점만 보고 달리는게 훨씬 나은 결정이라는걸 이제는 안다. 바닥을 마주하는건, 아주 많은 걸 알려준다. 결핍은 현명한 선생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