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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영 Feb 22. 2023

그가 세상을 떠났다.

 수없이 상상해 온 일이다. 한데 그 일이 이렇게 갑작스레 일어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정선에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제주 집 짐을 처분하러 내려가던 배 안이었다. 일곱 시간 운전으로 녹초가 된 몸을 3등실 구석에 짐짝처럼 구겨 던져 부족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부재중 전화 두 통. 엄마의 전화를 두 번이나 받지 못했다. 분명 이전에는 배에서 핸드폰이 터지지 않았는데. 의아스러운 것도 잠시, 엄마와 오빠가 있는 그룹 카톡방에서 엄마가 삼촌 연락처를 묻고 있었다. 배에서 핸드폰이 터지는 것보다 더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십수 년간 친가와 연을 끊어 온 엄마였다. 이건, 분명 그와 관련된 일이리라. 그 일을 예상하고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다. “일 차근차근 보고 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일이었다.




 욕실에 쓰러진 그를 발견한 건 엄마였다. 갑자기 오빠가 본가에 들른다기에 퇴근 후 가려던 결혼식에 가지 않고 엄마는 일찍 귀가했다고 한다.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고 육개장을 끓이는데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단다. TV소리겠거니 하고 부엌에서 계속 일을 보는데 반복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꺼림칙해 가보았더랬다. 그제야 욕조에 머리를 박고 고꾸라진 그를 발견했다고. 그의 얼굴은 부을 대로 부어 있었다고 한다. 놀란 엄마는 미처 신고할 생각도 못 하고 서둘러 그를 들어내려 했지만 이미 뻣뻣하게 굳어가던 몸은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단다. 하의는 벗은 채로, 상의만 입고 있었던 걸로 보아 티셔츠를 벗으려다 균형을 잃은 건지도 모른다. 아마 샤워를 하려다 쓰러졌겠지. 최근 들어 이상하게 자주 혼자 샤워를 했다고 한다. 일어서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문자 그대로 손 쓸 수 없어 버둥거리다 결국 일어나지 못한 것이리라. 작년 초,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로 오른 손발을 사용하지 못했던 그였다. 무서웠을까. 뇌에 출혈이 생겼을 때 말이다. 의식이 있었을까. 출혈이 목까지 넘어갔을 때 말이다. 목이 막혔을까. 의식은 서서히 지워졌을까. 한순간이었을까. 무서웠을까. 의식이 남아있을 때 누군가를 찾아 울부짖었을까. 엄마가 들었다는, 희미하게 끙끙거리는 그 소리는 울부짖음이었을까.

 그 짧은 순간, 나를 떠올리긴 했을까.




 20대 후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그리움에 사무쳐 울던 그를 안아주었을 때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 누그러진 줄 알았다. 하나 최근에도 며칠 그와 한 집에 머무는 동안 내 안의 화가 또다시 움트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평생 당연하다는 듯 시키기만 한 사람. 그래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줄 모르는 사람.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조금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사람. 고마움도 미안함도 모르는, 변함없이 이기적인 사람.




 1년 전 그에게 뇌경색이 온 후로 가끔 서울 집에 갈 때마다 그의 손발톱을 깎아줬다. 한 번은, 다 깎은 후 이렇게 말했다. “고맙지?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해봐” 그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그러지 말고 말해봐. 어서” 그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고맙다”

 그 세 글자가 그의 입안에 머문 적이 있긴 한 걸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 안에도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고마움도 미안함도 입 안 가득한데, 그게 너무 커다랗고 버거워 뱉어내질 못 했던 걸까.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진 그는 수술을 해도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은 건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며칠을 더 버틸지 모르지만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건 분명했다. 당근마켓에 처분할 짐을 모두 올리고 다음날 거래하기로 예약했다. 생신을 맞으신 사랑하는 스승님의 생신 축하 메시지 영상을 모으고 편집했다. 집중이 잘 되었다. 보일러 땐 제주집 거실에 토퍼를 깔고 누워 할 일을 모두 마친 후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 눈이 떠졌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카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소영 상주님, 메디힐병원장례식장입니다”로 시작하는 메시지였다. 정말이지 놀라운 시스템이었다. 간밤에 보일러가 끊겨 빨간 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세수와 양치만 하고 속옷과 옷가지 몇 개만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평일 오전이라 당연히 비행기표가 있을 줄 알았다. 늦어야 낮에 출발하게 되겠지. 그런데 대체 무슨 날이기에, 서울행 비행기가 모두 매진이란 말인가. 서울뿐만 아니었다. 육지행 비행기가 모두 매진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3년 전에도 했다. 제주는, 이럴 때 제주는 정말이지 살기 지독한 곳이라 느꼈다. 서울행은 대기를 걸 수도 없는 상황이라 급히 항공사 두 곳에 부산행 대기를 걸어두고 카운터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 순간 공항에 나보다 더 초조한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 대기마저 실패하면 이번에도 배를 타고 가야 하나. 밤에는 도착할 수 있을까. 엄마는 또다시 중차대한 일을 홀로 해나가야 하나. 아니지, 오빠가 있지. 오빠는 엄마 곁을 지키고 있을까.




 부산행 티켓을 얻어냈다. 탑승 시간 임박이라 달려가야 한다고 안내받았다. 그 사이, 친척 오빠와 친구들이 서울행 비행기표를 끝까지 알아봐 주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 김해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서울행 KTX에 몸을 싣고 가까운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열차 안이라 그럴 여유가 있었다.

 집부터 들러 깨끗이 씻고 집에서 가까운 장례식장까지 달려갔다. 오후 다섯 시 반이 되어서야 빈소에 도착했다. 한참 지나 깨달았다. 부산에서 왜 KTX를 탔을까, 김포행 비행기를 탔으면 금방인데.




 상복으로 갈아입고 그의 영정사진 앞에 섰다. 이건 대체 언제 적 사진인가. 안 그래도 작년부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사진이 없다고. 그렇다고 사진을 찍자 하기엔 좀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막상 장례식장에 걸린 영정사진을 보니 미안함을 무릅썼어야 했나 싶었다. 사진 속 그는 내가 유치원생인 시절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보다도 두어 살 어린 모습이었던 거다.

 사진을 보고 당황한 몇몇 조문객들은 “인물이 좋으시다”, “젊었을 때 미남이셨다”고 말했다. “사진이 그렇게 없었냐”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사진이 그렇게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소원한 사이였다, 우리는. 그런데 그의 친구 한 분이 자신에게 그의 사진이 있다며 대뜸 핸드폰을 보여주셨다. 작년 초, 속초의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그의 독사진. 친구들과 여행도 다녔구나. 사진을 찍기도 했구나. 한참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오빠와 나는 사진을 그의 핸드폰으로 전송했다.




 첫날, 일찍 도착하신 친척들께 그의 마지막 모습을 묘사하며 엄마가 울었다. 엄마가 우는 모습은 태어나 처음 보았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냈는데 마지막 모습이 안 돼 보여 자꾸만 떠오른다고 했다. 힘없이 울먹이는 엄마를 보며 나도 눈물을 훔쳤다.

 둘째 날, 입관하며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친척들과 함께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궜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는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틀 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했던 큰삼촌은 “형, 잘 가”하며 엉엉 울었다. 그 모습에 또 눈물이 났다.

 생전에는 입어보지 못했던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그는 관에 들어갔다.




 빈소가 한가하면 빈자리에 생각만 가득 들어찰 텐데, 미처 연락을 제대로 드리지도 못했건만 많은 분들이 와 주셨다.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고 고마웠다. 엄마와 이모는 나와 오빠의 손님이 많은 것에 기특하고 고마워했다. 그것으로 우리가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 판가름하는 듯했다.

 한 분 한 분께 모두 인사드리고 지인들과 짧게나마 이야기 나누다 보니 금세 시간이 갔다. 정신이 또렷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해 기력 없이 앉아 있는 엄마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빠도 나도 그 어느 때보다 의젓하게 할 일을 찾아 했다.




 둘째 날 오후가 되자 그의 친구분들도 속속 도착했다. 어렴풋이 낯익은 그의 오랜 고향 친구분들이거나 그와 함께 택시기사 생활을 했던 낯선 동료분들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며 술병을 비워냈다.

 그의 고향 친구분들이 오빠와 나를 자리에 앉혔다. 우리가 어릴 때 그는 모임자리에 항상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특히 나를 어찌나 예뻐했던지, 애기 때부터 커서 너무 예뻐질까 걱정했단다. 딸바보인 그의 모습은 사진에서나 보았지 기억에는 없는 일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직장 동료 중 한 아저씨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영정사진 앞에 소주병을 놓고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께 피해가 되어 몇 번을 만류해도 자꾸만 술병을 들고 찾아와 그에게 주절주절 말을 걸었다. 급기야 고성방가가 시작되더니, 끝내 엄마와 오빠에게 따져댔다. 니들은 마이너스라고. 그 자리에 내가 없어 나만 치욕을 면했다.

 또 어떤 아저씨는 “아빠가 니들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며 술 취해 윽박지르기도 했다. 본인 딴에 고생했을 수야 있다. 돈 버는 게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아니까. 그렇지만 우리를 ‘키우느라’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었다.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술 취해 집에 들어오는 현관 밖 발걸음 소리가 아이의 심장을 얼마나 불안히 뛰게 만들었는지 당신이 아냐고. 행여 길에서 마주칠까 두려워 늘 주변을 살피던 초등학생 어린이의 마음을 당신이 아냐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던, 그때부터 용돈까지 스스로 벌어야 했던 청소년의 고초를 당신이 아냐고. 당신이 말한 고생은 우리에게 한평생 미움과 원망을 받은 경상도 남자의 주정 섞인 한탄 아니냐고. 그들이 그의 편일 순 있다. 한편으론 고마운 일이다. 그치만 그와 함께 사느라 모질어진 우리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나도 모르게 “가지가지한다”라고 읊조렸다. 오늘까지 만이라고 생각했다.




 셋째 날 새벽, 발인을 하기 위해 빈소 앞에 모였다. 장례지도사분께서 그러라기에 가장 앞에 서 영정사진을 들었다. 아무런 느낌 없이 그저 걸었다.

 화장터에 줄 선 운구차량들의 꽁무니가 이어졌다. 같은 날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떠났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자들이 줄지어 누워 재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엔 그도 있었다.

 차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대기해야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화장장 앞에 섰다. 그때도 가장 크게 통곡한 건 큰삼촌이었다. 유리벽을 치며 “형, 잘 가”라고 했다. 큰아버지께서는 뜨거우니 도망치라고 하셨다. 곧 철문이 닫히더니 장례지도사분께서 화장하는 동안 식사하러 이동하라 안내하셨다. 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순서였지만 효율적인 순서이긴 했다.

 친척분들과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대기하다 다시 화장장으로 이동했다. 가루가 되어 가는 그를 내 품의 사진 속 그가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남김없이 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담겼다. 내가 그의 영정사진을, 오빠가 유골함을 들고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는 버스 위에 올라탔다. 노곤함에 눈이 감겼다.

 먼 길 와주신 일가 친척분들이 모두 떠나고 오빠도 분당 집으로 돌아갔다. 별안간 가족들의 부재로 초조했을 포동이와 산책한 후 엄마와 나는 한 침대에 누워 깊은 낮잠을 청했다.




 다음날. 우리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그의 고향으로 떠났다. 나와 엄마, 오빠, 포동이, 그리고 그의 유골까지. 어린 시절 기억이 지워진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었다. 어쩐지 소풍 같았다.

 그가 가장 편하게 쉴 수 있을 그의 고향에 그를 보내며 한 사람씩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빠도 엄마도 소리 내어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나는 끝내 소리 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 가득한데, 그게 너무 커다랗고 버거워서.











 아빠. 다음 생에는 우리 반대로 태어나자. 나는 아빠로, 아빠는 내 딸로. 아빠한테 받지 못한 거 내가 다 해줄게. 사랑으로 키워 줄게. 그땐 우리 추억도 많이 만들자. 시간이 많이 흘러도 잊히지 않도록. 차고 넘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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