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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잎클로버처럼 Dec 08. 2022

엄마도 엄마의 반성문 좀 읽어야 겠어요!

마음을 읽다.


엄마의 반성문이라니!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큰아이의 감정에 더 많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잘 놀아주는 듯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싸우다가 혼나고 우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마음을 다쳤던 것 같다.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때쯤엔 문득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엄마! 엄마도 <엄마의 반성문> 좀 읽어야겠어!”

“응? 책 말이니? 네가 그 책을 어떻게 알아?”

“우리 선생님이 그 책 읽고 있대. 엄마도 읽어봐야 할 듯해.”

"... ... ..."


할 말을 잃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이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마음이 쓰인다. 분명 책의 내용은 모를텐데 <반성문>이라는 단어의 분위기에 엄마를 넣은 것이다. 엄마가 하는 행동에 뭔가를 말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읽어졌다. 


엄마도 항상 잘 할 수마는 없지만, 잘 못하고 있다는 걸 아이한테 지적당한 기분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에 대한 부정 감정이 느껴지자 혼란스러웠다. 훈육을 잘 하려면 아이 앞에서 당당해야 하는데,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한 순간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7~8시. 저녁 준비에 숙제 돌봐주고 다음날 준비물 챙기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지쳐있고 여유가 없었다. 잠잘 시간이라고 하면 책을 가져온다. 각자 한 권씩만 읽어 주고 자기로 약속을 한다. 잠자리에 읽는 책 읽는 시간은 그나마 여유 있었던 것 같다. 셋이 나란히 눕는다. 왼쪽은 아들, 오른쪽은 딸을 두고 가운데 누워서 책을 높이 들고 읽는다. 천정의 밝은 전등의 눈부심을 피하기 위해 팔을 쭉 뻗어 직각으로 높이 든다. 읽다가 책이 얼굴 쪽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엄마 눈을 쳐다본다. 


"엄마, 자니??ㅋㅋㅋ"

베개만 대면 자는 나는 아이보다 내가 먼저 자는 날도 많았다. 책 읽어주다가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멈추기도 한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아챈다. 


"엄~마~~~ 일어나~!" 

내 얼굴을 살랑살랑 흔들기도 하고, 볼을 툭툭 치는데... 

나를 흔들어 깨우는 아이의 목소리가 귀여워서 잠이 번쩍 깬다. 다시 읽어준다. 어느새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한다.


"자, 오늘은 그만. 잘 시간이야. 내일 또 읽자."

"안~돼~~~ 더 읽고 싶단 말이야~~~"


그러다 자장가 한곡 부르다가 꿈나라로 향한다. 

그러 보고니 이 추억은 행복한 기운이다. 

엄마의 어떤 말과 행동이 불편하고 억울했던 것일까? 공격적인 말투와 잔소리들이 떠오른다.


동생과 다툴 때면 언제나 약자인 동생 편을 드는 것 같은 엄마가 당연히 미웠을 거라 생각이 든다. 이러한 부정 기운들이 아이의 마음을 움츠려들게 했을 것이다. 6살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아이는 갑자기 웬 날벼락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다투다가 동생이 울면 애를 왜 울리냐면서 다그치고 상황 파악 보다는 즉흥적으로 쏟아내기에 바빴다. 상황을 잘 들어주고 이해 한 후 차분하게 대응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굳이 핑계를 찾자면 나는 거기까지 헤아릴 에너지가 없었다. 삶이 바빴고 늘 분주했고 체력도 점점 바닥이 드러났다. 


지나고 보니 더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내가 많은 일을 할 수 없으니 위임을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친정과 시댁 어른들의 도움을 못 받으면 돌봄 이모님에게 위임을 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엄두를 못 냈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 잠깐 이용해 보았는데 훨씬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한편으론 그런 시간을 겪었기에 지금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미안했던 일과 나의 상황들을 점검하며 긴 휴직을 결심했다. 육아 휴직 3년을 보내고 마지막 4년 차를 보내고 있다. '부'와 '명예' 대신 '관계'와 '시간'을 선택한 결정이 참 값지다.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 


어른의 잘못된 행동, 무심코 던진 언어들이 상처가 된다는 걸 알았다. (나도 모르게) 일그러진 표정과 가시 돋친 말들, 공격적인 말투는 어느 순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특히, 어떤 아이에게는 가슴에 콕 박혀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어른들은 사회생활에 늘 예의 있게 행동한다. 화가 나도 최대한 참으며 정중하게 말한다. 그러나 가장 작은 사회인 가정에서는 예외가 되기도 한다. 나도 그렇다. 가장 편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한다. 


나는 선언했다. 내 아이의 감정을 잘 보듬어주자고. 그리고 예쁜 말을 생활화하자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 역시 잔소리와 쏘아 붙이는 딱딱한 말은 싫어한다.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자. 불만을 토로하기보다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로 했다. 항상 잘 할 수는 없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했던 많은 시간 동안 다쳤던 아이의 마음은 치유가 된 듯하다. 함께 영화 보기, 친구랑 함께하는 공동체 프로그램 참여하기, 평일 날 동생 빼고 둘이 데이트하기(도서관에서, 보드 카페에서), 엄마와 아이가 함께하는 독서습관(엄아독 프로젝트) 참여하기, 엄마랑 배드민턴, 엄마랑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더 다정하게 챙겼다. 이중 아이가 눈에 띄게 좋아하는 것은 동생 빼고 둘이 데이트이다.


조커 2개가 엄마에게 들어온 줄 모르고...^^, 보드게임 카페에서('20. 1월)


감정에 있어서 조금 더 섬세한 아이 덕에 나는 가끔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위로를 받은 적이 더 많다. 내 기분을 알아주고 챙겨주는 아이가 기특하고 고맙다.


"엄마,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나의 기분 같은 건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무의식 가운데 나의 기분이 지금 안 좋은지 자각하기도 한다. 


"엄마가 오늘 참 행복해 보여서 내가 너무 기뻐.^^."

'응. 엄마 지금 좋아.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 내가 행복하니 네가 더 행복해하는구나!' 라는 말로 전달되어 더없이 기쁜 순간도 있었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아이 친구들이 함께  인라인을 타는 중이고 엄마들은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나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아이가 인라인을 타는 중에 오며 가며 그 상황을 본 모양이다. 


"엄마! 방금 누구랑 그렇게 통화했어?"

"왜? 엄마 친구랑 통화했는데."

"그래? 엄마 기분 정말 좋아 보이던데. 하하하 웃고. 엄마가 그렇게 웃는 모습 요즘 본 적이 없는데."

"본 적이 없다고? 엄마 원래 이런데. 이렇게 웃는데. 하하 호호."(집에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잇몸 만개, 입꼬리 승천한 엄마의 모습이 몹시 낯설었나 보다. 엄마의 이런 면까지 잘 관찰하는 아이를 보니 아차 싶다. 아이 감정의 순수한 보석들을 잘 들여다보고 잘 만져줘야겠다. 


키도 크고 몸도 자랐다. 여전히 마음은 여리지만 성장했다는 게 눈에 띄게 보인다. 여전히 동생을 질투할 때도 있지만 어느덧 동생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나를 키우는 것과 같다. 

더 많은 깨달음과 더 큰 세상을 보는 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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